오정미 작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NHK>로부터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의 영화화 제안을 받았을 때 이 감독은 직접 맡을 생각이 없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한 오 작가는 “지난 10년 동안 ‘세상은 멀쩡하고 세련되어 보이는데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다’는 주제에 꽂혀 있었는데, <헛간을 태우다>를 읽고 그 주제에 좀더 깊이 가볼 수 있겠다”고 판단해 이창동 감독에게 직접 해보자고 제안했다.
2016년 어느 날, 오 작가는 이 감독에게서 이미지 두개를 건네받았다. 텅 빈 비닐하우스 안에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널려 있는 이미지와 벌거벗은 남자가 차를 태우는 이미지였다. 이창동 감독은 그에게 “비닐은 영화적인 재미가 있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고, 값어치가 떨어지는데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벌거벗은 남자는 우리 영화의 엔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오 작가는 이 감독과 함께 자연의 무심한 풍경과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명의 아름다움, 그 사이에 있는 벌거벗은 인간의 이미지에 대해 긴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시작된 <버닝>은 요즘 시대가 찾고 있는 분노를 다루되 “처음부터 우리는 (분노가 비롯된)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결말을 정해”두었다. 오작가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많은 20대들을 만났다. 마침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의혹사건, 촛불집회, 대통령 탄핵을 경유하면서 시나리오 방향이 바뀌었다. “촛불혁명을 겪고 난 뒤 사람들은 분노를 해소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도 ‘이제부터 시작’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했고, 어디까지 서사를 확장할지 고민”한 게 지금의 영화가 되었다.
영상원 전문사 졸업작품인 시나리오 <벚꽃동산>을 계약하면서 스승 이창동 감독과 함께 여러 각본을 쓴 지 5년 만에 내놓은 첫 장편영화 <버닝>을 떠나보낼 때가 됐다. “오랫동안 편지를 쓴 기분이다. 시간이 지나서 읽어야 의미를 알 수 있는 연애편지 말이다. <버닝>이 사람들에게 그런 편지 같은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버닝>을 쓰면서 단편영화 <미스터 쿠퍼>를 연출하기도 한 그는 기회가 된다면 연출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영화를 계속한다면 감독이 되고 싶다. 영화감독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웃음)”
워낭
“이창동 감독님과 진짜 안 맞는 게 있다. (웃음) 학교 다닐 때도, <버닝>을 진행할 때도 감독님은 대화를 진짜 길게 하시는데, 대화를 나누자마자 곧바로 글을 못 쓰게 하신다. 보름쯤 지난 뒤에 ‘써와라’라고 하시는데 초고를 쓸 때부터 체력적인 한계가 오는 거다. 글을 쓰다가 졸릴 때 워낭을 한번 흔들어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뒤 글을 썼다. (웃음) 왼쪽 워낭은 이준동 나우필름 대표님이 주셨고, 오른쪽 워낭은 동네 주물트럭에서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