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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소녀> 백승화 감독 -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좋다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18-05-31

<오목소녀>의 이바둑(박세완)에겐 뼈아픈 도피의 역사가 있다. 이름부터 타고난 바둑 신동이었으나 천재를 향한 찬사 앞에서 실패 공포증이 생겨버린 것. “질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하얘지는 바둑은 어느덧 한쪽 옆구리에 효자손을 끼고 오목두기를 즐기는 기원 아르바이트생이 됐다. 오목이 스포츠이긴 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라면 <오목소녀>의 풍경은 꽤 센세이셔널하게 다가올 테다. 백승화 감독은 경보에 목매던 만복이의 성장 스토리(<걷기왕>(2016))를 거쳐 어느덧 승리가 목적인지 월세 벌이가 목적인지 분간이 힘든 이바둑의 오목 선수 훈련기를 그린다. 세상살이에 초연한 초등학생 조영남(이지원)과 바둑의 라이벌 김안경(안우연)도 청춘의 애잔한 귀여움을 더한다. 마이너 스포츠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에 대한 두 번째 작품을 만든 백승화 감독은 SK 브로드밴드 옥수수앱 공개와 스크린 상영을 동시에 진행하며 주류영화가 그어놓은 경계선에 대범한 빗금을 친다. 백승화 감독과의 인터뷰는 영화의 러닝타임과 같은 57분간 진행됐다.

-옥수수앱을 통해 작품이 이미 조금씩 공개되고 있다. 새로운 플랫폼에 대한 욕구가 있었나.

=<걷기왕> 당시에 썼던 시나리오인데, 소재나 분위기가 일반적인 장편영화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더라. 제작사인 인디스토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고, 경험삼아 새로운 시도를 함께해보길 원했다. 그래서 웹드라마로 풀어보려고 일단은 가지고만 있었다.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제작지원사업을 통해 1억4천만원 정도 제작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SK 브로드밴드 옥수수앱에서 공개하게 된 건 수익구조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 일반적으로 네이버를 통해 공개되는 웹드라마는 웹에서 쉽게 소비되고 사라지고 만다는 게 안타까웠다.

-첫 웹드라마 작업을 마친 후 결과적으로 가장 크게 체감한 변화는 무엇인가.

=처음엔 60분이 조금 덜 되는 웹드라마 작품이 굳이 극장 개봉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지금은 소규모지만 극장 개봉도 하게 되어서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배우들 입장에선 큰 스크린에서 관객과 만나는 모든 기회가 소중하다. 웹드라마 형식을 통해 극장에서 다루기는 어려운 소재나 주제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내게도 일종의 돌파구가 됐다. <걷기왕> 작업 당시부터 고민하던 지점이다. 일반적인 기준에 얽매이지 않은 작업을 하고 싶었다. 물론 웹드라마가 한창 주목받던 초창기에 비해 나는 약간 늦게 뛰어든 감도 있다. (웃음)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작업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여건에 대한 고민도 컸겠다.

=<걷기왕> 이후 몇몇 시나리오 의뢰가 있었다. 고민도 해봤지만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직은 내가 하고 싶은 걸 좀더 해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작업의 진전이 더뎌지는데, 마냥 기다릴 수는 없지 않나. 부담 없이, 재밌는 농담하듯이 한 작품 정도 해보고 싶었다. <걷기왕>은 예산도 그렇고, 심은경 배우를 비롯해 너무나 많은 분들과 함께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부담과 책임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캐주얼한 형식과 플랫폼이기에 가능했던 설정을 꼽아준다면.

=웹드라마는 조금만 지루하면 사람들이 스킵을 해가며 본다. 그만큼 빠른 편집이 중요하다. <오목소녀>는 내가 직접 편집을 맡아서, 특히 속도감을 중시하며 작업했는데 막상 결과물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웃음) 그외에 피부에 와닿은 건 음악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걷기왕>의 경보에 이어 이번엔 오목이다. 마이너한 스포츠에 대한 취향은 어떻게 생긴 건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목은 좋았다. 내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당시엔 놀잇감이 많지 않아서…. (웃음) 오목은 물론이고 바둑, 장기도 동생과 가끔 즐기곤 했다. 경보도 그 연장선상인 것 같고. 관심이 깊다고 보긴 어려운데 생활체육에 자꾸만 애정이 간다.

-<걷기왕>에 이어 <오목소녀>를 하게 되면서 다음 작품엔 무슨 스포츠가 나올까 궁금해하는 시선도 많겠다.

=그렇다. 그 질문 자주 듣는다. 사실 생각해놓은 게 있긴 한데…. (웃음) 게이트볼 영화는 어떨까? 이것도 <걷기왕> 때 생각했던 건데, 최근 들어 영상을 좀 찾아보고 있다. 대체로 연세가 있는 분들이 많이 하는 종목이라는 점을 비틀어봐도 재밌을 것 같다. 마냥 훈훈하고 따뜻하게 가지 않고, 승부욕 넘치는 경쟁을 그리는 거지. 실제로도 치열한 세계라고 하더라. 중장년층 배우들을 섭외하는 게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울 것 같아서 아직은 농담 정도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거창하지 않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에 대한 애호가 느껴진다. <걷기왕>의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목소녀>의 “이기지 않아도 괜찮아” 같은 주제와도 자연스레 연결되는데.

=<걷기왕>을 준비할 때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우리 세대가 처한 상황을 두고 비슷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은 나 외에도 많다. 영화뿐 아니라 다른 직업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렸을 땐 내가 더 대단한 걸 이룰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10대 시절엔 자신이 천재가 아닌가, 정말 특별한 존재가 아닌가 들뜨지 않나. 어느 순간 특별한 이들은 극소수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거기서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좋다. “그럼 난 어떡해야 하나?”라는 질문 앞에서 자기만의 장점과 자기만의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 말이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이제 뭐하지?” 지금도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다.

-영화를 통해 오목협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협회에서는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줬나.

=오목 기보를 마련하는 것까지 직접 하는 건 좀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오목협회에 시나리오를 보냈다. 협회에서 흔쾌히 도와줬다. 따로 사무실이 있는 건 아니어서 경기가 있으면 나와 배우, 스탭들이 직접 보러 갔다. 한번은 에스토니아팀이 한국을 방문해 친선전이 열린 적도 있었다. 대체로 아시아권에서 즐기는 종목이지만 유독 에스토니아가 유럽에서 도드라지는 오목 강국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도 있다. 영화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오목 공부를 시작했는데, 나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오목의 룰이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다. 한번은 중국과 일본에서 오목하는 분들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걷기왕>은 성희롱 예방 교육을 최초로 실시한 사례로도 화제가 됐다. <오목소녀>에서도 현장 운영에 특별히 염두에 둔 점이 있나.

=영화 현장에 만연한 강압적인 위계 질서나 폭력적인 면들을 개선하기 위해 평소에 함께 고민을 나누는 동료들과 팀을 꾸렸다. 이번 영화로 처음 만나는 스탭들일지라도 함께 만들어가야 할 현장의 밑그림에 대해 서로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였다. <걷기왕> 때 성희롱 예방 교육 시간을 마련한 남순아 감독이 어느덧 직접 강사가 되어서 강의를 해줬다. 과거에 비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는 현장이 늘어났고, 짧은 교육 프로그램이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최소의 테두리를 지켜나가는 일은 중요하다고 본다.

-앞으로 계획 중인 작업 방향이 있나.

=이번 <오목소녀>를 거치면서 독립영화가 매번 상업영화처럼 길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영화 작업엔 룰이 없다.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상업영화가 제시하는 분량의 틀을 벗어나는 작업도 고민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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