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와 상관없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위계가 작동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아니, 거의 그렇다. 일 때문에 만났거나 초면임에도 사람들은 지나치게 예의를 갖춘다. 문제는 이 지나친 예의가 대부분 일방향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유사 가족, 유사 선후배, 유사 사제 관계 같은 것이 즉각 형성된다. 나는 낯선 사람과는 연령이나 직급과 무관하게 인격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맺어야 하며 그에 걸맞은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이”라는 변수는 상호 친밀성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관계 속에 스며들어 서로를 대하는 호칭과 존대어법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자명한 것은 아니다. 이 자연스러움은 시행착오와 노력을 통한 상호 조율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사람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면 바로 “말 놓으세요”라고 말한다. 특히 남성과 남성 사이에서 그런 일은 흔하다. 나는 자기 자신을 하대(?)해 달라는 이 노골적 요구가 늘 불편하다. 그런 종류의 예법은 내 생각에 기이할 정도로 깍듯하다. 그래서 나는 말을 놓으라는 상대의 부탁에 “내가 형이니까 그럴까?”라며 응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같은 거절(!)은 어색함을 야기한다. 나는 그 요구를 쿨하게 혹은 재치 있게 거절해야 하는데, 그런 임기응변이 늘 성공적일 순 없다. 또한 내가 상대방의 공손한 요구를 무례하게 거절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동등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일터라고 예외가 아니다. 꽃이 만발한 올해 어느 봄날이었다. 내가 재직하는 대학의 캠퍼스는 그날따라 꽃구경 온 인파로 가득했다. 건물로 향하는데 그 인파 속에서 내가 아는 몇몇 교직원들과 마주쳤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산책 겸 꽃구경을 하는 중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중 한명이 나를 보고는 “교수님, 바로 들어가서 요청하신 일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짧은 봄나들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괜찮아요. 꽃구경 천천히 하시고 오세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아까 그 교직원이 뒤따라 들어왔다. 나는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꽃구경 하셨어요?” 그러자 그 교직원은 (몸은 서두르면서도) 내게 말했다. “네네, 했어요.”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이분과 마주치지 말걸’ 그랬다. 못 믿겠다. 꽃구경했다는 그의 말을. 못 묻겠다. 거짓말한 거 아니냐고, 진짜로 꽃구경 잘한 거냐고. 차라리 교직원들이랑 같이 꽃구경 할걸 그랬나? 아니다. 그랬다면 그들의 꽃구경을 망쳤을 것이다. 애초부터 교직원들과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날 나는 그저 존재 자체로서 누군가의 꽃구경을 방해했다. 단지 내가 교수이고 그 누군가는 교직원이라는 이유로.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사회에서 “나를 당신보다 높이지 말아요. 우리 서로 동등한 관계를 맺어요”라는 제안은 오히려 불편과 어색함을 가져온다. 그런 사회에서 암묵적 초기 설정은 평등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평등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등한 관계는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초기 설정을 시간과 공을 들여 변경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교수가 교직원의 꽃구경을 방해하지 않고, 나아가 불편함 없이 함께 꽃구경을 하는 날은 그런 노력을 통해서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