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배우인 제보자 A는 2012년 서울 소재의 연기학원에서 정기훈 감독의 연기 수업을 들었다. 수업 첫날의 일이다. “정기훈 감독이 칠판에 남자 성기를 자세히 그린 다음 ‘한국 남자의 평균 크기는 몇 센티인데 자신은 그보다 더 큰 몇 센티’라는 발언을 했다. 당시 정 감독이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본인은 한손으로도 섹스가 가능하다, 어제 저녁에도 했다는 말을 했다.” 연기 수업과는 무관한 내용이었다. 학생들이 맥락과 무관한 수위 높은 성적 발언에 놀란 표정을 짓자 정 감독은 “이런 이야기에 놀라고 표정 관리 못하면 배우 못한다. 무슨 배우를 하려는 사람이 이러느냐고 얘기했다”고 한다. A는 정 감독이 수업을 진행할 때 여학생들 옆에 주로 앉았으며 여학생의 손을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정 감독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대놓고 불쾌함을 표하거나 항의하는 학생은 없었다. 적지 않은 수강료를 내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지만, 그들의 간절함이 도리어 불쾌한 상황을 참고 넘어가도록 만들었다. 해당 연기반은 정기훈 감독의 신작에 출연할 배우의 캐스팅 기회가 되리라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A에게도 정기훈 감독은 자신을 차기작에 캐스팅해줄지 모르는 ‘현역’감독이었고, <애자>(2009)와 <반창꼬>(2012)를 만든 ‘흥행’감독이었다. 결국 A는 수업을 몇번 듣다가 학원에 나가지 않았다.
신작 캐스팅을 기대했던 수업은…
연기학원에 확인한 결과, 학원쪽은 정기훈 감독의 강의 중 벌어진 일을 알지 못했다. 학원 관계자는 “그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없다”면서 “만약 정기훈 감독이 수업과 무관한 성희롱 발언을 했고 학생들로부터 불만이 접수됐다면 절대 수업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수업을 감독에게 일임하는 터라 수업내용이나 커리큘럼을 학원이 자세히 파악하고 있진 않다. 어떤 감독은 오디션 형식으로 수업을 하고, 어떤 감독은 학생들과 같이 단편을 찍어 현장과 유사한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수업을 통해 감독들의 차기작에 출연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보니 학생 입장에선 그런 일을 문제삼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정기훈 감독이 와일드한 성격에 입이 거칠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에게 그 정도 수위의 성적 발언을 할 줄은 몰랐다”고도 했다. 학원 관계자는 정기훈 감독의 수업을 듣는 게 힘들다며 상담한 여학생이 한명 있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한번은 정기훈 감독이 본인과 너무 안 맞아서 수업을 듣기 힘들다고 찾아온 여학생이 있었다. 감독이 말을 너무 거칠게 해서 상처가 된다는 거였다. 성적인 표현이 심하다는 얘기는 없어서 그저 단순히 말이 직설적이고 거칠다고만 이해했다. 그래서 ‘현장에서 감독이 말을 거칠게 한다고 연기 안 할 거냐,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다시 수업을 듣게 했다”는 것이다. 학생에게도, 학원에게도 정기훈 감독은 ‘갑’이었다. 그에겐 신인배우를 캐스팅할 권한이 있었고, 학원에선 그런 현역감독이 필요했다.
제보자 A는 학원 밖에서도 정 감독에게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 정 감독을 포함한 영화인들이 모인 술자리에 A가 참석했다. 연기 수업 당시 불쾌한 경험이 있었지만 일대일 만남이 아니기에 그 자리에 나갔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야한 농담과 성희롱이 계속됐다. A는 불쾌하다는 의사 표시를 했고 정 감독은 “섹스를 잘해야 연기도 잘하는 거다. 연기하려는 애가 성경험도 없이 무슨 연기를 하려고 하느냐. 여자배우는 섹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석한 사람들도 정 감독의 말에 동조했다. “정 감독은 말만 저렇게 한다. 실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거였다. 오히려 A만 술자리 분위기를 못 맞추는 사람이 돼버렸다. 수치심을 느낀 A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술자리에서의 패턴은 비슷했다. 정 감독이 성희롱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주변 사람들은 그를 치켜세우거나 옹호하거나 방관했다. 그 자리에서 정 감독은 왕이었다.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방관자나 옹호자가 돼야 했던 이들 중엔 정 감독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는 배우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정 감독은 A에게 “(성경험을) 열번만 채우고 열한 번째는 나에게 달라”는 발언을 했다. 정 감독의 술자리 농담이 A에겐 잊히지 않을 성희롱으로 남아 있다.
A가 제보한 내용에 대해 정기훈 감독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정 감독은 특정 발언에 대해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도 그 의도에 대해서는 해명했다. 우선 연기학원에서 성기 얘기 등을 한 것은 “자유분방하게 이루어지는 수업에서 농담 차원으로 한 이야기”라고 했다. “아마 영화 속 성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강의를 재밌게 하기 위해 자기 비하를 하다가 ‘나는 몇 센티’라는 얘기를 했을 거다. 특정인을 상대로 그런 말을 했다거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수업 중에 학생의 손을 잡은 일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상대가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나 스탭들한테 친밀함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어깨를 툭툭 친다거나 가벼운 포옹을 하거나 스킨십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그게 소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학원에서 들은 얘기도 ‘학생들이 감독과 친해지고 싶어 한다. 허물없이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려거나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
A는 정기훈 감독뿐만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현장에서 경험한 크고 작은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연기를 잠시 쉬었다. “미팅이나 오디션 연락이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가방에 가위를 챙기는 일이었다”고도 했다. “권력을 가진 감독이나 투자자가 절대자의 위치에서 힘없는 사람에게 성희롱을 일삼는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내가 연기를 하지 못하게 될까봐 강하게 반발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원망했다.” 용기를 내어 제보한 건 “가만히 있는 내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화계 내 미투 운동이 일어날 당시 ‘침묵한다’와 ‘동참한다’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지금도 떨리고 무섭지만 이런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나보다 더 어린 친구들이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더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촬영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 다른 제보자인 B는 정기훈 감독의 영화현장에서 경험한 일을 들려주었다. 정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적 있는 배우 B 또한 “이런 일을 그냥 넘기면 스스로가 방관자가 되는 것 같아 제보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기훈 감독의 언어폭력과 성희롱은 이미 유명했다. ‘내가 영화감독을 하는 이유는 여자를 탐하기 위해서다’, ‘너는 줘도 안 먹는다’ 같은 상스러운 말을 술자리에서나 현장에서나 스탭들에게 지속적으로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말들에 상처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제보자 B는 “물리적 성폭력을 일삼는 사람이 악질 중의 악질이겠지만, 그렇다고 언어폭력과 성희롱을 가볍게 넘겨서도 안 된다”며 “언어폭력이 심한 감독들이 있지만 그들이 감독이기 때문에 묵인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정 감독의 현장에서도 대부분이 성희롱을 그냥 웃어넘기고 만다고 했다. “‘어우, 또 저런다’, ‘미친놈’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스스로가 고통스럽다. 그렇게 현장의 스탭과 배우들이 길들여진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감독의 언어폭력과 성희롱을 상시적으로 접해야 하는 주연배우들의 고통이 클 거다. 그들이 성희롱의 직접 대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런 분위기의 현장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또한, 복수의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2015) 현장에선 주연배우와 함께 일하는 여성 스탭이 정기훈 감독의 성희롱으로 고생한 사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정기훈 감독은 “여성 스탭들에게 각별하게 신경 쓰고 친절을 베푸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명했다. “‘예쁘네, 오늘은 더 예쁘게 하고 왔네’ 같은 말들을 했다. 성적인 농담을 한 건 아니었고 예쁘다고 칭찬하는 정도였다. 근데 그 말이 상대에겐 기분 나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 감독은 자신의 언어폭력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언어폭력이 심했던 것도 맞다. ‘씨X, 왜 이렇게 늦게 와’ 같은 말을 툭툭 던졌다. 20년도 전에 연출부 막내로 일을 시작했고, 당시의 현장에 익숙했던 것 같다. 그땐 ‘오야지’ 어깨 주무르는 건 별일도 아니었으니까. 현장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었다는 걸 안다. 스탭들한테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하는 게 문제라는 걸 알았으면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때도 그런 일은 없었을 거다.”
참고로 지난해부터 <씨네21>은 지속적으로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를 기사로 다뤄왔다. 당시 <씨네21>로 들어온 제보 중에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스탭이 문제제기한 정기훈 감독의 언어폭력도 있었다. 해당 영화에 참여한 스크립터에게 정 감독이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이 기사((<씨네21> 1079호)에 실렸다. 정기훈 감독, 콘티 작가, 스크립터가 사무실에 함께 모여 콘티 작업을 하던 중 정 감독이 스크립터에게 “어깨 좀 주물러 달라”고 했고 이에 스크립터가 불쾌해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도 정 감독은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피곤한데 나 어깨 좀 주물러줘’, ‘싫어요 감독님’, ‘싫으면 말아라’ 하고 넘어갔던 일이다. 이후 제작부장한테 그게 잘못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스탭은 어깨를 주무르는 사람이 아니죠’라고 얘기해주더라. 아차, 내가 도제시스템에서 너무 오래 일하다보니 이렇게 됐구나 싶더라.”
언어폭력의 위중함을 알아야
제보자 B는 “여전히 영화현장에는 남자가 다수다. 그러다보니 미투 발언을 하면 귀찮은 일을 일으킬 수 있는 배우로 비쳐 캐스팅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제보조차 하기 힘든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캐스팅이 안 될 거라는 불안이 있다. 옳은 얘기를 하는 건데, 언론은 자극적으로 제목을 뽑아 배우의 이미지를 특정하게 고정시켜버리고 사람을 위축시킨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든다.”
현실적으로 언어폭력이 심하다거나 성희롱을 일삼는 감독을 현장에서 퇴출시킬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필요한 건 자정에 대한 노력이고, 용기 내 부당함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영화사 명필름의 대표이자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공동 센터장인 심재명 대표는 정기훈 감독의 사건이 “권력관계 안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전했다. “일반적으로 막내 남성 스탭이 여성감독에게 성희롱을 하거나, 남성감독이 여성 제작자에게 성희롱을 하진 않는다. 성폭력은 대개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은 사람을 향한다. 정기훈 감독의 사건 역시 그러한 위계관계 안에서 발생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경쟁력 있는 상업영화 감독을 젠더의식이 부족하고 성적 불쾌감을 준다는 이유로 영화에 기용하지 않는 일은 없다. 그럴 만큼 현재의 한국영화계가 성숙하진 않다. 하지만 미투 운동이나 든든의 활동, 의미 있는 언론보도를 통해 경각심이 생기면 공고한 남성 중심적 문화도 서서히 변할 것이다. 피해자를 현장에서 배제하고 역차별하는 분위기 또한 변할 것이다.” 제보자 B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다른 많은 배우들과 더 폭넓게 연대하는 자리를 가져보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렇게 더 크고 단단한 공론의 장이 마련되길 기대한다.
<씨네21>에 제보한 피해자는 필요 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에서 상담 및 법적·의료적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든든에서 상담을 받은 피해자가 공론화를 원할 경우, 협의 후 <씨네21>에서 기사화할 수 있습니다. #with_you <씨네21>과 든든이 함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