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이 쉽게 찾아지는 것이라면 ‘대안의 영화’라는 말이 구호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올해로 3회를 맞기까지 전주국제영화제가 걸어온 길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2년 전 영화제가 출범할 때 “이미 부산과 부천에 국제영화제가 있는데 왜 또 만드느냐”는 비판에 직면했고, 지난해에는 영화제 직전에 프로그래머가 바뀌는 악재가 닥쳤다. 그럼에도 애초에 내걸었던 ‘대안의 영화’라는 원칙을 저버리지 않고서 차분히 성과를 쌓아왔지만, 올해에도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영미권 영화의 수급이 배급사들의 이윤 논리에 막혔고, 개막작으로 마땅한 한국영화를 찾기도 힘들었다. 칸영화제와 기간이 가까운 탓에, 미리 점찍었던 남미의 수작 몇편을 칸에 뺏기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구해온 250여편의 영화들 가운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감독의 작품은 많지 않지만, 프로그램 하나하나엔 땀냄새가 배어 있다.
오는 4월26일부터 5월2일까지 7일간 열리는 이번 행사에서 우선 눈에 띄는 건, 이 영화제가 첫회부터 강조해온 디지털영화들의 강세다. ‘N 비전’에서 ‘디지털의 개입’으로 이름을 바꾼 이 부문에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마이크 피기스에 더해 배우인 에단 호크와 장 마크 바가 감독한 작품까지 가세해 다양성과 깊이가 배가됐다. 두 경쟁부문 중 하나인 ‘아시아 독립영화 포럼’에서는 개인간의 소통과 성정체성의 문제를 파고드는 중국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경쟁부문인 ‘현재의 영화’에 출품된 5편의 남미영화는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 중심의 세계화의 그늘에 덮인 이 대륙 구석구석의 사회문제를 파고든다.
영화광일수록 회고전과 특별전에 주목하게 마련. 전주영화제는 올해도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반파시즘의 일념으로 삶을 불태웠으나, 그 급진성으로 인해 금기시돼온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7편을 필름으로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또 미국 독립영화의 대모 크리스틴 버천 특별전에 초청된 토드 헤인즈와 토드 솔론즈의 작품들은 이번 행사에서 놓치면 아까울 영화로 한두 손가락 안에 꼽힐 것 같다. ‘애니메이션 비엔날레’는 벨기에의 라울 세르베, 러시아의 페도르 키투르크, 일본의 구리 요지 등 대가들을 불러모아 2년에 한번씩 여는 축제로서의 위용을 갖췄다.
전주국제영화제는 감히 ‘대안의 영화’라는 까다로운 원칙을 내건 원죄로 인해 아직도 자기 자리를 모색해가는 과정에 있는 듯하다. 그건 발견의 재미를 관객과 함께 나눌 공간을 더 열어놓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임범 isman@hani.co.kr ▶ 상영작 일정표
개막작 케이티
역사의 그늘
KT 감독 사카모토 준지. 한국·일본. 2002년
<케이티>는 1973년 한국과 일본의 8월을 뜨겁게 달궜던 김대중 납치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이 사건의 진상을 그리려는 영화는 아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 주일 한국영사관의 일부 외교관, 그리고 일본 자위대가 이 사건의 수면 아래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폭로하고 있지만, <케이티>가 진정 보여주려 하는 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들의 비장한 삶이다. 이 사건의 피해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라, 가해자인 중앙정보부 요원 김차운과 자위대 소령 도미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이같은 주제를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눈을 번득이는 김차운과 ‘군인이 아닌 군인’이라는 존재조건을 견디지 못하는 도미타는 자신만의 신념을 세우고 이에 따라 단호하게 행동을 취한다. 반면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중앙정보부와 자위대라는 거대한 조직은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기만 한다. 조직은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소소한 개인들쯤은 구덩이에 파묻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뗄 뿐이다. 아웃사이더들의 비루한 삶을 격정적이면서도 넉넉하게 담아온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국가, 조직,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장벽 뒤에서 꿈틀거리는 군상의 모습을 힘있게 스케치해낸다. 자위대, 천황 등 일본사회의 터부를 향해 정타를 날리는 그의 기백도 느껴진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갖지 못한 일본 관객을 주대상으로 한 탓에, 한국 관객으로선 때때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한국영화 회고전
한국영화가 기억하는 전쟁
전쟁과 영화를 주제로 내세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 회고전에서는, “상흔과 기억-한국전쟁과 한국영화의 모더니티”라는 제목 아래 16편의 영화를 모았다. 신상옥 감독의 1958년작 <지옥화>부터 박찬욱 감독의 2000년작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한국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작품들을 상영한다. 정신이상의 노모와 만삭의 아내, 양공주가 된 여동생 등 희망없는 일상을 지탱해가는 철호의 가족을 통해 전후 서울의 삭막한 삶을 담아낸 유현목 감독의 대표작 <오발탄>, 하반신 불구가 된 작가와 그 아내의 불륜을 다룬 이만희 감독의 <귀로>는 전쟁이 남긴 피폐한 상처를 돌아보는 작품들. 유현목 감독의 영화로는 전쟁중에 살해된 목사들의 죽음을 추적하는 <순교자>, 남북의 이념대립이 낳은 비극을 그린 <장마> 등 2편이 더 상영된다. 탄피를 주워 파는 휴전선 부근 마을의 아이들과 이들을 돌보는 젊은 여선생의 이야기인 김수용 감독의 <사격장의 아이들>, 전쟁으로 삼각관계의 운명에 빠진 남북한 군인들을 다룬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 등도 전후사회의 기억을 담은 60년대 영화들이다. 그 밖에 빨치산과 이산가족 문제를 소재로 한 임권택 감독의 <짝코>와 <길소뜸>, 살인사건의 내막에 얽힌 전쟁의 흔적을 돌아보는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 전쟁 때문에 꼬여버린 자매의 인생역정을 따라가는 배창호 감독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와 양공주로 살아가는 여성들을 그린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전후세대의 성찰을 보여주는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와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 등이 상영된다. ▶ 2002 전주국제영화제
▶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회고전
▶ 크리스틴 버천 회고전 부문
▶ 아시아 독립영화포럼 부문
▶ 현재의 영화 부문
▶ 애니메이션 비엔날레
▶ 한국단편의 선택: 비평가 주간, 한국영화의 흐름
▶ 중국과 일본의 전쟁영화·어린이 영화궁전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