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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팜>,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 만들기
2002-04-19

1999. 10 ~ 2001. 9

할리우드가 꿈의 공장이라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얘기다. 영화로 세상을 배우고 영화로 꿈을 꾸는 이들에게 할리우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러나 영화는 어디에서 누구와 찍든, 그 자체로 험하고 지난한 작업이다.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마음이 맞지 않는 이들과 손발을 맞추는 일이 고통스런 투쟁을 수반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충무로에서 <축제> <장밋빛 인생>의 시나리오를 썼던 육상효 감독은 미국 유학의 길에서 첫 영화 <아이언 팜>의 열쇠를 쥐었다. 그리고 글쟁이 특유의 예민한 촉수로 체험한 할리우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할리우드 키드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행복했을까. 대신 그는 이런 얘길 들려준다. 환상을 접고, 현실을 만나자. 영화를 만드는 건 언제나 어디서나 외로운 싸움일지니. 편집자 주

1999년 10월

수업을 곱씹으며, 모욕을 되씹으며

지난밤을 꼬박 새우다. 그래도 스스로 대견하다. 25장짜리 트리트먼트를, 그것도 영어로 하룻밤 만에 쓰다니. 첫 학기 단편 시나리오가 끝나고 장편 아이디어를 트리트먼트로 내놓는 시간이다. 동일한 장소에서 일어나는 3신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하라는 단편과제에 난 자동차 주행시험중의 차 속 이야기를 썼다. 3번씩 시험을 봐야 했던 비운의 사나이와 미녀 시험관의 짤막한 사랑. 좌회전, 우회전, 차선 바꿔요.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녜요? 이 대사는 사실 빌리 와일더의 <이중 배상>에서 베낀 것. 얼굴면적이 자기들보다 두배쯤 되는 늙수구레한 동양 학생을 신기해 했던 첫 학기의 급우들과 처음으로 소통한 시간. 아, 이 사람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들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느낀 건 언어와 낯선 문화에 대한 초조감에서 나온 지나친 생각이었을까. 각자의 시나리오를 읽고 토론하던 첫 수업 시간에 내 발언 차례가 됐을 때, ‘안 들리는데요’라고 말하고 난 네 시간 동안 한마디도 안 했다. 아니 아무도 나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래, 삶은 모욕으로 성장한다. 이 모욕을 길이, 그리고 깊이 기억하자.

철사장이 고통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을까? 사랑의 또 다른 내용이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은유할 수 있는 것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경험한 바에 다르면 사랑은 일종의 심리적 함정이고, 그 함정은 절대로 논리적인 방식으로 탈출되지는 않는다. 철사장과 연관된 내 기억은 내가 다니던 중학교 뒷마당에서 진짜 모래를 끓여놓고 연습하다가 손가락을 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담임교수 테드 브라운이 묻는다. “뭐가 제2장의 끝이냐?” 맙소사, 영문법에 신경쓰느라 구조에 대한 준비를 해놓지 않았다. 내가 우물거렸다. “아이언 팜의 좌절, 생일파티 신.” 그러나 교수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그것이 2장 전체의 사건을 종결한다 할 수 있을까?” “난 그렇게… 믿고 싶은데….” 실패다. 구조에 대한 생각없이 시나리오를 쓰면 그것은 암흑 속을 걸어가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요지로 한 교수의 장광설이 이어졌다. 교수지만 나랑 나이는 거의 비슷하다. 내가 한국에서 직업적 시나리오 작가였다는 사실을 이 교수에게는 하지 말자. 한국영화계 전체에 대한 모욕이 될지 모르니까. 수업 끝나고 나온다. 수업을 곱씹으며, 모욕과 분함을 곱씹으며 나온다. 이 교정에서 마이크 니콜스는 <졸업>을 찍었다. <졸업>의 시나리오는 2장이 5개의 시퀀스로 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라고? 시퀀스 좋아하고 있네. 그런 거 몰라도 난 한국에서 대종상까지 받았다. 언젠가는 니네들이 깜짝 놀랄, 니네들이 그렇게 추앙해 마지않는 <졸업>보다 더 훌륭한 시나리오를 쓰겠다. 2장의 시퀀스는 한 100개쯤 해두지. 그러면 너네는 교실에서 이 시나리오는 2장이 100개의 시퀀스로 되어 있는 아주 특이한 구조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등을 친다. 스테파니. 코네티컷에서 온 자유분방한 아가씨다. “쌩, 니 트리트먼트를 아주 감명깊게 읽었다. 아주 우아한 코미디가 될 거 같다.” 이런 말을 듣는데도 난 서너번씩은 되물어야 그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말로 쓰는 시나리오과를 기본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는 학생이 다니고 있다. 장님이 촬영기사가 될 수 있을까?

2000년 봄

그래, 로맨틱코미디로 가자

서울에서 홍지용 프로듀서가 왔다 갔다. 인간으로서 이렇게 술을 멀리하고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내 의문을 일거에 해소시키고 갔다. 인간이 술을 멀리하는 건 술을 마실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밤낮으로 마셨다. 영화를 만들자. 이렇게 간단한 결론을 내는데, 삼일 밤낮이 걸린 셈이다. 영화의 제목은 아이언 팜. 덕분에 학교 숙제는 줄줄이 밀려 있다. 시나리오 구조론의 달인 데이비드 하워드 선생은 3장의 트위스트를 계속 추궁한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학과장 존 퓨리아 선생은 이 시나리오가 우화가 될 것인지 아니면 로맨틱코미디의 장르 공식을 선택할 것인지를 계속 추궁해댄다. 코언 형제의 영화로 대표되는 우화는 부조리한 상황들의 연속으로 그 부조리한 웃음들 사이에서 관객은 주제에 대한 다른 각성을 얻는다. 로맨틱코미디는 역시 <해리와 샐리가 만났을 때> <유브 갓 메일>의 노라 에프런이 가장 대표적이다. 노라 에프런 영화는 가볍지만 그녀만의 독특한 노하우가 숨어 있다. 일단 들으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는, 그러나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생활에 대한 세밀한 인식들을 스토리 곳곳에 배치한다. 그것들은 그녀의 로맨틱코미디를 따뜻하게 만들어놓는다. 내 감각적 선택은 우화로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학과장은 선택을 물어보면서도 장르를 선택할 걸 은근히 강요한다. “장르에서 이미 수많은 감독과 관객이 소통하고 갔다. 장르가 곧 상상력의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축구 경기는 같은 게임의 룰을 가지고도 매번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네가 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다니까 하는 소리다.” 장르로 가면 첫번째로 바꿔야 할 것은 영화 속 지니의 선택이다. 장르란 뻔한 결론을 뻔하지 않게 느끼게 하는 투쟁이다. 그래, 그럼 이 영화는 로맨틱코미디다. 캐릭터가 거기에 다른 무늬를 줄 것이다.

2000년 5월

‘반듯한 근육질’, 차인표가 필요하다

압구정동 튜브 카페로 차인표가 들어온다. 밤 열한시인데도 반듯하게 양복을 입었다.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조금 전 방송 녹화가 끝나고 다시 갈아입었단다. 너무 예의바른 사람은 어떤 때는 거북하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쓰면서는 16mm로 가는 저예산 장편영화를 생각했다. 스타를 캐스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미국에서도 틈틈이 친구들과의 전화 통화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만약에 스타가 아이언 팜 역할을 맡는다면 그는 차인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근육질 몸과 반듯한 이미지가 이 영화에 필요하다. 그가 한다면, 그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무너뜨린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담긴 그의 반듯한 이미지는 내 코미디의 또 하나의 재료가 될 것이다. 예전에 TV 주말극에서 그의 코믹 연기를 인상깊게 본 적이 있다. 그가 아니면 다시 이 기획은 16mm 장편으로 돌아간다. 차인표는 농담으로 자리를 시작한다. 어색한 분위기를 배려하는, 이런 행동도 대단히 예의바른 사람들의 행동이다. “방송사 카메라 감독님에게 육상효 감독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보고 왔거든요.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아주 훌륭한 분이시라고요. 제가 지금 미국에서 공부하고 계시데요 그랬더니 그분이, 아, 역시 훌륭한 분이시구나. 육십이 넘은 나이에 미국으로 또 공부를 하러가시고. 근데 <살어리랏다> 찍고 언제 미국에 가셨지? 윤삼육 감독님과 헷갈리셨더라고요.”

2001년 1월

아들아, 아빠를 이해해다오

한국으로 돌아갔던 식구들이 다시 왔다. 아내는 떠날 때와 비슷한 개수의 가방을 들고, 6개월 만에 한국과 미국을 오가느라 얼떨떨한 지민이 손을 잡고 LA 공항에 나타났다. 난 반대했다. 나 외에 다른 가족이 영화에 관련된다는 건 그만큼 더 우리 가족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지민이가 장차 영화를 한다면 난 목숨을 걸고 말릴 생각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두 난 안다. 지금까지 오면서 겪은 내 상처를. 지민이는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원했듯 의대나 법대를 가야 한다. 근데, 내가 미국에 있는 사이 아내 이윤정과 프로듀서 홍지용은 이윤정의 미국 현지 프로듀서 일에 합의했단다. 남편의 말을 화창한 봄날 우산장수 소리만큼도 안 여기는 아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감독의 말을 이렇듯 철저하게 무시하는 프로듀서는 또 뭔가. 그 소식을 듣고 곱절의 배신감에 뒤척이다가, 그래도 가족이 온다는데, 차를 몰고 공항에 나왔다. 가족을 보자 머리가 아득해진다. 낯설고, 물선 미국에서, 내가 지고 가야 될 것은 여전히 불안한 프로젝트와 가족이다. 지민아, 선뜻 반가워하지 못하는 아빠를 이해해 주기 바란다. 세상은 너가 아는 것보다도 훨신 더 배신과 음모로 가득 차 있단다.

2001년 4월

시나리오? 더이상 어떻게 다듬으라고

아파트 단지 중앙 공원의 분수는 약 1m 정도 하늘로 아주 힘없이 치솟다가 이내 커다란 와인잔같은 그릇으로 떨어져버린다. 벌써 여기에 앉아서 분수만을 쳐다보기를 며칠째.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내내 파랗다. 눈을 작게 하고 하늘을 보고 있으면 프레임의 가장자리로 바람에 흔들린 야자수 꼭대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프로젝트는 가을로 연기됐다. 덕분에 난 아무 이유없이 학교만 휴학한 꼴이 됐다. 프로듀서는 시간이 좀 생겼으니 시나리오를 좀 다듬잔다. 나보다 더 속이 타고 있다는거 다 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는 이미 충분히 다듬었다. 더이상 뭘 어떻게. 이제는 찍는 일만 남았는데. 어제는 차인표가 전화했다. “감독님 힘드시죠.” 그의 굳건한 자세가 큰힘이 된다. 오후에는 책장사하는 친구 회사에 가서, 세 시간 동안 책박스를 날랐다. 분수대만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 단순한 노동은 사람을 단순하게 집중시킨다. 그런데 나이는 못속이나 보다. 허리가 아프다.

2001년 8월

자동차 미국 횡단에 나서다

네브래스카는 끝없는 평원이다. 돌아갈 일 없는 길은 끝도 없이 앞으로 펼쳐져 있다. 인구는 20만명도 안 된단다. 면적은 남한보다 크단다. 여기 어디 빈땅에 말뚝이나 박고농사나 지을까? 자동차 미국 횡단은 아내의 아이디어다. 촬영을 앞두고 심기일전하잔다. 절대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 것이 여행의 제1 원칙이다.

2001년 9월

프로듀서가 돈들고 튀면 어쩌지?

드디어 토니, 아만드 두명의 프로듀서에게 최초의 제작비를 주고 왔다. 영화의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와인까지 한잔씩 마셨다. 약 5천만원 정도다. “너무 많이 주었나?” 아내가 묻는다. 나도 아까부터 계속 그 생각을 하고 불안해 하고 있었지만, 얘기하기 싫어 안 했던 말이다. 5천만원을 들고 그들이 어디로 사라지면 찻을 길이 없다. 전 재산을 털면 투자사에 그 돈을 갚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프로듀서가 돈을 갖고 사라진 영화에 투자사는 더이상 투자하지 않을 거다. 그러면 그간의 노력은 물거품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것도 창피하고 진짜 네브래스카 평원으로 가서 농사를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거기는 다른 사람은 안 살아서 지민이가 다닐 학교가 없다. 그러면 지민이를 위싱턴의 형 집으로 보내나, 아니면 평촌의 할머니 집으로 보내나? 아빠랑 그렇게 잔정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니까 괜찮지만 엄마는 보고 싶어할 거다. 아내가 소주병을 갖고 온다. 불안한 마음을 소주로 달래잔다. 그러기에 왜 미국에 와서 영화를 하냐? 아내와 같이 일을 하는 한 스트레스는 집 안과 밖 경계가 없다. 집이 곧 전쟁터다. 휴대폰으로 아만드한테 전화를 해본다. 사무실을 알아보고 방금 들어왔단다. 왜 전화했냐고 묻는다. “그냥, 같이 일을 하게 된 게 기뻐서, 굿 나잇.”▶ <아이언 팜>,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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