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입술을 열면>은 장마다 시 제목에 특이한 기호들이 붙어 있다. 그것은 별이기도 하고, 꽃일 때도 있고 십자가, 술병, 눈송이이기도 하다. 컨트롤과 F10을 눌렀을 때 나열되는 특수기호 이상의 기호들이 시의 이름 앞에 매달려 있다. 이는 시 바깥의 각주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시어를 설명하는 각주가 아니라 시 바깥에서 다른 화자가 시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읽힌다. 영화에서 디졸브 기법이라고 할 법한 장면전환기법을 시에도 적용한 것이다.
내가 요즘 읽었던 시들은 시 안에서 시의 이야기를 소화한다. 시어에는 주인공이 있고 그것에는 한편의 서사가 있었다. 그러나 김현의 <입술을 열면>에 수록된 시들은 다르다. 그들은 앞과 뒤의 문단이 서로 다른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고, 유기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도 읽힌다. 하지만 한편을 어렵사리 다 품에 안았을 때에는 우리가 이미지처럼 보이는 시를, 시가 된 삶을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김현의 시를 통해 미래에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어떤 영혼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를테면 두 번째 수록 시 <기화>에서 그 영혼은 보리차를 끓이는 연기 사이에 슬며시 나타난다. 그는 ‘혼자 눈 쌓인 공원을 산책하고 돌아와’ 따스한 보리차 연기의 온기를 느끼며 수면양말을 신고 발가락을 꼼지락대는 사람이다. 봄의 문턱에서는 특히 <조선마음 8>이 각별히 다가온다. ‘오늘은 반듯이/ 입춘이라는 단어를 입술에서 떠나보낸다/ 그게 봄이다/ 봄에는 꽃을 주는 사람이 되자/ 마음먹고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을 산다’. 봄에는 타인에게 꽃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마음먹고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을 사는 사람. 인간은 긍정을 품고도 비극을 온몸으로 헤쳐나간다.
시인은 ‘이 시집의 시들은 생활의 가까이에서 생활에 가까운 것을 경계하며 쓰였다’고 했다. 어두운 과거가 물러나고 우리가 서로를 잡아주고 끌어주면서 계속 살아갈 힘을 얻었음을 말하는 시, 김현은 수필집 <질문 있습니다>에서도 입술을 열어 고백하고 고발하고 말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의 힘에 대해 썼다. 당신이 입술을 열어 말을 함으로써 달라지는 세상을 확인하는 요즘, 우리는 미래가 오고 있는 것을 본다.
미래가 온다
우는 것과 울음을 멈추게 하는 것으로 동성애자는 슬퍼질 수 있다
점점 더 개구쟁이가 되어가는 은재야 우리에게도 사랑과 축복이 있으니까
미래에 우리는 산 택시에 합승할 수 있고 떨어진 은빛 동전을 줍기 위해 같은 손을 내밀 수 있고
(중략) 잘 자라주렴 너만은 아니지만 너로도 미래가 온단다
아빠와 엄마와 우리가 있는 그대로 그러했듯 (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