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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의 우아함에 대하여

직업인으로서의 전문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더 포스트>는 망각되거나 무시되고 있는 영화적 호흡의 생생한 결과물이다. 화면을 잘게 나눠 심장 박동을 의도적으로 자극하거나 호흡이 달리는데도 과시적으로 화면을 길게 끌고 가는 허세가 없이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가운데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야 할 때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의 이 화면 붙이기는 하나의 화면 속에서 배우들이 최적의 움직임과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호흡을 보장한다. <더 포스트>의 모든 장면들은 영화 현장에서 오래 버티며 통달한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장인적 능숙함을 증명하는 예시들이다. 노련한 감독의 지휘 아래 화면 세팅에 필요한 최상의 기술이 동원되는 가운데 메릴 스트립톰 행크스를 비롯한 배우들의 능란한 연기가 펼쳐진다. 이 영화는 현장에서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것들의 최상의 결합이다.

공간에서의 인물의 주도권

<더 포스트>의 주인공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은 <워싱턴 포스트>의 대표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경영권을 행사하던 남편이 죽자 대신 대표 자리를 맡았다. 거대 신문사의 오너지만 영화 초반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조직을 장악하지 못한 채 대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사회로부터도, 저널리즘의 전문성을 내세우는 편집국으로부터도 소외당하는 처지다. 현금 보유액이 적어 은행으로부터 투자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논의하는 이사회에 참석할 때 캐서린은 절친한 이사인 프리츠(트레이시 레츠)의 도움을 받아 미리 연설할 내용을 점검하지만 막상 이사회에 들어서자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우물쭈물 연설할 타이밍을 놓치고 난감해하는 캐서린 대신 캐서린이 말할 내용을 대신 말해주는 이는 프리츠다. 이런 상황은 이후로도 되풀이된다. 화면에서 지배권은 늘 캐서린이 아닌 주변 인물들이 쥐고 있으며 캐서린은 주변 인물들에게 포위돼 있는 모습이다. 그는 무리 속에서 시선의 중심이 아니며 시선을 먼저 주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내는 권능이 없다. 그의 시선을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으며 시선이 다른 사람들과 교차되는 순간에도 말의 겹침과 더불어 그는 자신의 의사를 묵살당하거나 가볍게 뿌리침당하는 자의 위치에 있다.

영화의 상당수 장면을 차지하는 집단 장면에서 캐서린은 대체로 고립되거나 포위돼 있지만 <워싱턴포스트>의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는 다르다. 그는 경쟁사인 <뉴욕타임스>가 펜타곤 비밀 보고서를 입수해 특종을 터트리기 전과 터트린 후에 그에 맞먹을 만한 기사를 개발하려고 애쓰지만 딱히 방법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권능은 막강하다. 그는 편집국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발행인 캐서린 앞에서도 당당하고 매주 한 차례 캐서린과 갖는 조찬에서 백악관의 기피 인물로 찍힌 기자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면 안 되겠느냐는 캐서린의 조심스런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벤은 원할 때면 언제든 캐서린의 집무실에 들어설 수 있지만 거꾸로 캐서린이 벤의 집무실에 나타나는 장면은 이 영화에 없다.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벤은 편집국 내에서 자주 무리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는 화면의 중심이며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아내는 존재다. 그의 그런 권능을 드러내는 것 중 하나는 편집국의 특집 담당기자가 히피로 보이는 어느 여성으로부터 비밀 서류 뭉치를 받고 곧바로 벤의 집무실로 달려가는 장면이다. 그 기자는 곧바로 벤의 집무실에 들어설 수 없다. 그가 들어서려는 걸 비서가 막고 그걸 무릅쓰고 들어서자 편집국장 벤이 손짓으로 물리친다. 그는 옆방으로 들어가 전국 담당 에디터에게 문서를 보여주고서야 편집국장실로 들어설 수 있다. 문서를 본 편집국장과 간부 기자들이 흥분하는 사이에 맨 처음 문서를 전달받은 그 기자는 자신에게 문서를 갖다준 히피 차림 여성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설명한다. 머리 스타일과 의상 차림에 관해 그가 자세히 설명하는데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늘 작업하는 기자들로 분주한 신문사 편집국 내에서 벤 브래들리는 자기만의 공간에 있을 때나 사무실을 횡단할 때 화면의 지배권을 갖고 있으나 캐서린은 그렇지 못하다. 그는 기자들로부터는 전문성이 없다는 이유로, 회사 이사들로부터는 경영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이 드러내지 않는 경원과 무시에 내몰린다. 그건 당연하게도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와 연결된다. 심지어 이사들 가운데는 그들이 결함이라고 여기는 그 사실, 캐서린이 여성이라서 투자에 어려움이 있는 걸 캐서린 앞에서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캐서린은 이들의 대화 상대가 아니지만 그 모욕감을 차분히 품위 있게 견딘다. 메릴 스트립이 뛰어나게 연기하는 이 모욕감에 대한 인내의 몸짓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잔한 감정을 자아내게 하지만 그것이 연민이나 동정과 같은 수직적 태도의 감정으로 이어지기에는 메릴 스트립의 자태가 단호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홀로 그 모욕감을 견딘다. 주변 사람들에게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처럼 대우받는 것은 상류사회에 속한 그의 신분과도 상관이 없으며 그가 남성 사회의 전유물로 여겨진 공적공간에 서는 순간 그는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된다. 반대로 캐서린이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주관할 때 그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는 지배권을 얻는다. 그는 주인공이고 화면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를 따른다. 그곳은 여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캐서린의 입장을 공간 내의 섬세한 동선 배치와 시선의 교환을 통해 능숙하게 묘사한다. 이 영화에서 캐서린과 벤이 등장하는 모든 집단 장면은 감탄할 만큼 정교한 동선 배치와 화면 연결로 짜여 여성 리더가 겪는 곤경을 드러낸다. 캐서린이 공적인 공간에서 필사적으로 견디고 감추는 자신의 감정을 유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은 딸과 대화할 때다. 딸과 집 안에서 말을 주고받을 때 비로소 캐서린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것들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한다. 딸은 캐서린의 말을 대체로 받아치며 어머니인 캐서린에 대한 응원을 역설적으로 부추긴다. 영화에 처음 나오는 대화 장면에서 딸은 역대 대통령과 친하게 지냈던 그레이엄 가문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권력을 견제하는 언론의 역할을 신랄하게 냉소하며 꼬집는다. 두 번째 대화 장면에서, 곧 캐서린이 정부 당국의 공격과 법원의 보도 통제 판결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입수한 펜타곤 보고서를 기사화하려고 하는 시점에서, 캐서린의 딸은 캐서린이 드러내는 인간적인 연약함과 공포와 그에 맞서려는 용기를 보고 눈물을 글썽인다. 이 장면들은 공감의 기운을 품고 정확하게 연결되는 두 사람의 시선과 동작을 따라 설계되어 있다.

품위의 완성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캐서린은 서서히 화면의 지배권을 장악한다. 펜타곤 비밀 보고서를 뒤늦게 입수하고 편집국장 벤이 고참 기자들을 자택에 불러모아 기사화를 시도할 때 자택에서 파티를 집전하고 있던 캐서린은 벤의 전화를 받고 주변 경영진 간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벤의 기사화 결정을 허락한다. 이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캐서린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고 화면 구도 내에서 캐서린은 화면의 지배권을 확립한다. 나중에 다시 한번, 펜타곤 비밀 보고서의 제공자가 <뉴욕타임스>에 문서를 제공한 사람과 동일인임이 확인되고 복잡한 법적 문제가 제기됐을 때 캐서린은 자기 집 서재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기사화 가능 여부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선다. 기사화 강행을 주장하는 편집국장과 그걸 반대하는 이사들 사이에서 캐서린은 시선의 중심에 서며 자기 말을 자르며 들어오는 이사의 말과 시선을 뿌리치고 화면의 중심에 선다. 따로 단독화면으로 잘라내 붙이는 구성이 아니라 집단화면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전개되는 이 장면에서 캐서린이 품위 있게 자기 결정을 확언하는 이 장면은 관객의 눈물을 빼낼 만큼 감격적이다.

이는 벤 브래들리의 아내가 기사화 결정이 난 후 의기양양했던 남편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는 장면과 공명된다. 벤의 아내는 직업적 만족감에 들떠 있는 남편에게 진정으로 용기를 발휘한 승자는 캐서린이라고 일깨운다. 캐서린은 주변에서 자신을 무명씨라고 취급하는 시간들을 견디며 자존을 지켰다. 사람들은 캐서린을 무시했지만 캐서린은 언론의 사명과 경영의 의무 사이에서 옳은 길을 판가름하려고 애썼으며 그게 자기 존재 증명의 길이라는 걸 알았고 그때까지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견뎠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캐서린이 보여주는 자존의 증명 표현은 윤리적인 딜레마에 빠졌을 때 자기 윤리에 기초한 결단과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관한 웅변이다. 그런데 그 웅변은 섣부른 말과 감정의 과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캐서린이 보여준 침착한 품위의 형태를 다시 강조하며 시각적으로 묘사된다. 캐서린은 절제된 말과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주며 받아친다. 이 과정은 좀스런 클로즈업의 나열과 격정적인 연설 없이 묘사된다. 주인공 캐서린의 자존과 품위는 집단화면 내의 시선과 행동을 부드러운 흐름으로 조화시킨 스필버그의 연출을 통해 보증된다.

자존은 명분을 앞선다

평자들은 흔히 이 영화를 프랭크 카프라의 이상주의를 계승한 업적으로 평가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미국영화의 위대한 전통의 뿌리는 개인의 자존과 집단의 전문가주의를 찬미하는 경향에 있다. 선과 악의 이분법은 흔히 제도적 악과 선량하고 용기 있는 주인공 영웅의 대립으로 표상되지만 그 양자의 싸움은 명분을 내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힘에 맞서 견디고 이겨내는 개인의 자기 존중을 건 모험으로 진행된다. <더 포스트>는 물론 실제 사건에 기초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특종 경쟁 끝에 이르는 언론의 연대와 사명을 다루지만 그 명분의 속살을 이루는 것은 개인들의 자존을 건 결단에 있다. 사람들은 흔히 명분을 말하고 그 뒤에 숨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반대다. 캐서린이 펜타곤 비밀 보고서의 기사화를 최종 결정할 때 그걸 찬성하는 기자들과 반대하는 경영 간부들은 모두 명분을 말한다. 하나는 돈의 명분이고 다른 하나는 이상적인 언론의 사명이라는 명분이다. 그런데 이 결정을 어렵게 하는 가장 실질적인 곤혹스러움은 이 기사가 나갔을 때 겪을 경영상의 어려움, 곧 은행투자가들이 투자를 철회할지도 모른다는 현실론과 나아가 기사가 나가면 캐서린이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일신상의 위협에서 나온다. 캐서린의 곤경은 언론의 사명을 다하느냐 못하느냐 이 명분을 두고 갈등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또한 그들 주변 사람들의 엇갈린 의견도 그에 관한 것이라는 게 아니라, 이 결정을 통해 회사가 망하느냐 흥하느냐는 문제와 캐서린 자신이 감옥에 가느냐 아니냐는 문제로 구체화된다. 캐서린은 그 갈림길에서 자기의 자존을 증명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자존을 건 캐서린의 용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영화의 말미에 모든 게 다행스럽게 풀린 뒤 들떠 있는 편집국 내에서 캐서린이 가만히 편집국 사람들을 서서 지켜보는 장면이 있다. 기자들은 그런 캐서린 옆을 무심하게 지나치는데 (나는 이 장면도 신기했다. 회사 사장이 있는데 마치 투명인간인 것처럼 사원들이 그 옆을 인사도 없이 지나치는 광경) 이전 장면들과 비슷한 상태인데도 이 화면에서의 캐서린은 바닥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견고한 존재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캐서린은 신문이 인쇄되는 윤전기 앞에서 벤에게 신문은 역사의 초고를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멋있지만 지당한 이 말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 말을 하는 캐서린의 자태와 그걸 듣는 벤의 모습이다. 각자 자기 식대로 자존을 지켜낸 이 두 전문가는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상황이 또 잘못된다면 그걸 감당하는 것은 캐서린의 몫이라고 벤은 말한다. 이런 대화를 우리 사회에서 기대할 수 있을까. 명분 이전에 개인의 자존과 직업에 임하는 개인들의 전문가주의가 실은 실제로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라는 걸 이 마지막 장면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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