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의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후보 지명은 오스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배우 및 시나리오작가로 경력을 쌓아왔던 그는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로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역대 다섯 번째 여성이 됐다(반면 <레이디 버드>에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수여했지만 감독상 후보에서는 제외시켰던 골든글로브는 <가디언> 등의 매체로부터 백인 남성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레이디 버드>는 그레타 거윅의 실제 고향인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대학 입학을 앞둔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시얼샤 로넌)의 성장담을 그린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하는 그레타 거윅 특유의 창작 방식을 통해서, 더 많은 여성감독과 캐릭터가 영화계에 필요한 이유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오스카에서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각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레이디 버드>가 실제 수상의 영광까지 누릴 수 있을지 지켜보기 전에, 이 창작자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다.
노아 바움백의 뮤즈만이 아니다
한동안 그레타 거윅의 이름은 그의 연인인 노아 바움백과 세트처럼 붙어다녔다. 노아 바움백이 연출하고 그레타 거윅이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시나리오는 두 사람이 함께 썼기 때문이다. 가령 1여년에 걸쳐 완성한 <프란시스 하>의 시나리오는 두 사람이 틈나는 대로 나눈 대화로부터 스토리를 발전시키는 식으로 함께 작업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이들 작품을 노아 바움백의 영화로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고, 많은 매체가 그레타 거윅을 “노아 바움백의 뮤즈”라고 수식했으며, <1843 매거진>은 두 사람의 관계를 “우디 앨런과 다이앤 키튼”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레타 거윅은 대학 시절부터 많은 희곡을 쓰고 직접 연출을 맡은 적극적인 창작자지만, 종종 그의 기여도는 여성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시나리오에 도움을 준 정도로 낮게 평가받았다. 독립영화계에서 동료들과 함께 멈블코어 운동(초저예산, 로키 조명, 비전문 배우, 즉흥적인 대사를 특징으로 한다)을 통해 작업하다가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로 이름을 알린 그에게 “잇걸”이나 “뉴욕의 대표 힙스터” 같은 단순한 라벨링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노아 바움백의 그 어떤 작품보다 많은 상을 받았고 북미에서 4700만달러의 높은 수익을 올렸다. 지금은 어떤 매체도 그레타 거윅을 누군가의 무엇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당시 프레스 투어에서 한 기자가 연인과의 교제가 창작에 미친 영향을 묻자 “함께할 동료를 찾은 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창작에 있어) 꼭 남자가 필요하지 않고, 어찌됐든 일을 해냈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 2년 뒤의 일이다.
스토리는 개인의 경험에서 온다
<레이디 버드>는 그레타 거윅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극중 사건이나 캐릭터의 특징은 실제와 같지 않다. 그레타 거윅은 원래 이름 대신 스스로 지은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리기 바라던 학생이 아니었고, 머리를 붉게 물들이지도 않았으며, 미국 동부의 대학에 가겠다며 부모와 금전적 문제로 다툰 경험도 없다. 하지만 “영화의 핵심인 고향, 유년 시절, 그리고 떠남의 정서”는 감독 자신의 것이었다고. 영화의 배경인 2002년은 9·11 이후 미국 전반에 체념적 정서가 지배한 시기이면서, 그레타 거윅이 실제로 19살이었던 때다. “영화의 어떤 것도 나에게 실제 일어난 사건은 아니지만, 그들은 진실과 조우한다. 창작을 할 때 감정적인 진실로부터 시작해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항상 생각한다.”(<LA타임스>)
자전적인 이야기로 인지된다는 점에서 <프란시스 하>는 크리스틴이 뉴욕에 간 이후의 이야기를 미리 예고했던 것처럼 보인다. 실제 그레타 거윅도 극중 프란시스처럼 발레를 하다 그만둔 경험이 있다. 당시 <너디스트>와의 인터뷰는 20대 뉴요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를 보여준다. “20대에 뉴욕에서 살고 있다는 특수성이 한 세대에 대한 글로벌한 증언이 되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은 실제로 특정한 누군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갖는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대학에서는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고 영화는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그레타 거윅이, 예비 영화인들에게도 스토리텔링과 드라마투르기를 따로 공부할 것을 굳이 요구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대신 “친구들에게 말하거나 편지를 쓸 때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각자 갖고 있으니 당신의 생득권이 곧 이야기 구조”(<오프 카메라>)라고 조언하고 있다.
<레이디 버드> 촬영현장의 배우 시얼샤 로넌과 감독 그레타 거윅(왼쪽부터).
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필요하다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으로부터 창작의 재료를 찾는 그레타 거윅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항상 여성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혹은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롤라 커크나 <레이디 버드>의 시얼샤 로넌처럼 함께 작업하고 싶은 여성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다. 설상 엉뚱하고 나중에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 될지라도, 그레타 거윅이 만든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주체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중요한 관계는 또래 여성과 이루어진다. <프란시스 하>의 프란시스(그레타 거윅)와 소피(미키 섬너),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브룩(그레타 거윅)과 트레이시(롤라 커크)에 이어 <레이디 버드>의 핵심은 엄마와 딸의 관계다. 새크라멘토를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나려는 딸을 통제하려는 엄마 매리언(로리 멧커프)과 뉴욕에 있는 대학에 가기를 원하는 크리스틴 사이에는 오랜 애증이 서려있다. 또한 크리스틴은 극중 두 남자와 사귀지만 그보다 동성 친구와의 감정이 훨씬 중요하게 다뤄진다. 짐 패럴(도널 글리슨)과 토니(에모리 코언) 사이에서 갈등하던 <브루클린>의 시얼샤 로넌을 기억하는 관객에게는 흥미로운 또 다른 구도가 눈에 띌 것이다. 크리스틴의 ‘진짜’ 삼각관계는 두 동성 친구, 베스트 프렌드 줄리(비니 펠드스타인)와 예쁜 외모로 학교에서 주목받는 제니(오데야 러시) 사이에서 형성된다.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레타 거윅은 여성 캐릭터와 그들의 관계에 보다 집중한 이유를 언급했다. “클리셰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10대 소녀에 대한 많은 작품의 중심에는 남자가 있고, 그게 이야기를 이끄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런 영화들, 예컨대 존 휴스의 영화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자가 없었거나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면,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더 많은 여성 창작자들이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당시 <데이즈드>와의 인터뷰는 그가 영화계에서 여성들의 활약과 연대가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내가 만들어왔고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보면서, ‘이건 다 잘못됐어! 나만의 것을 만들어야겠어!’라고 생각하는 16살 소녀가 있기를 바란다. 내 작품은 다음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주는 일종의 여권인 것이다. 여전히 영화감독, 뮤지션, 소설가, 미술가 등의 그룹에 속한 이들의 리스트를 보면 전부 남자라서 짜증이 난다. 더 많은 여성이 필요하다. 보다 많은 여성들이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표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