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나는 말도 안 되는 글과 사진을 버무려 귀한 지면을 어지럽혀왔다. 자그마치 10년이나. 226번째인이 원고를 끝으로 ‘사진의 털’ 연재를 마무리 짓는다. 시작할 땐 30대 후반 씩씩한 새 필진이었는데, 어느새 40대 후반 칙칙한 헌 필진이 되고 말았다. 내일부터는 그마저 아니다.
언젠가 고백했을 것이다. 나는 사진에 중독됐고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진중독자의 눈으로 오늘의 만연한 사진풍조, 이 풍경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싶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사진의 역사를 언급하기는커녕 장면의 현재에 대해 떠들기 급급했다. 절박한 호소, 피 말리는 긴박함, 목격자의 알량한 의무 따위에 매번 붙들렸다. 어느덧 나는 시사잡지에 어울릴 법한 원고를 영화잡지에 욱여넣고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의 현실이야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지 않은가 자위하면서. 부끄러운 일이다.
꼬박꼬박 한번도 ‘빵구’ 내지 않고 연재를 이어간 건 다행이었다. 나는 썼다. 용산참사 일그러진 망루 아래서, 초고압송전탑으로 몸살 앓는 밀양행 차 안에서, 해군기지 강행으로 사라진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에 앉아, 남북이 무력으로 대치했던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비바람 몰아치는 진도 팽목항 어둠 속에서, 예술검열과 국정농단에 항의해 넉달 반을 강행했던 광화문광장 노숙텐트 안에서. 멀리 아르헨티나에서 쓴 적도 있었고,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쓴 적도 있었다. 아플 때도 썼고, 즐거울 때도 썼다.
어딜 가든 노트북을 챙겼다. 이곳에 마감하기 위해. 밀양에선 이 산 저 산 송전탑으로 오르느라 그럴 수 없었다. 휴대전화 작은 자판을 두드려 원고를 보냈다. 이 짓도 못할 짓이야, 혼잣말 하면서도 할 일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알게 됐다. 애독자들이 부르는 <씨네21>의 애칭이 ‘씨네리’라는 사실을. 우리집에선 <씨네21>을 농반진반 ‘신의21’이라 부른다. 내겐 ‘신의’를 지켜야 할 매체요, (적은 액수일지나) 꼬박꼬박 원고료를 보내와 가족의 일상을 지켜준 ‘神의 21’이었다. 그러나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물론 나를 더 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