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겨울밤, 경복궁역 근처를 걷다가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죽은 놈이었다. 어쩌다가 번잡한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길 가던 어떤 이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부주의한 어떤 이는 녀석을 차거나 밟고서야 기겁했다. 만져보니 따뜻했다. 방금 죽은 걸까. 어쩌면 내 손이 찬 탓에 느낀 온기였을지 모른다. 녀석을 안고 잠시 걸었다. 어둑한 화단이 보이자 거기에 뉘였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튿날 나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다. ‘고양이의 보은’을 떠올렸다. 물론 그럴 리 없고, 찾을 물건을 찾은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여겼을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죽은 동물을 만나면 한참을 바라보곤 한다. 죽은 사람이었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단지 내가 사람인 탓에, 죽은 사람을 무심히 볼 수 없다. 그래선 안 된다는 강박이 머리를 누른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 동물일 뿐인데.
죽은 동물이 하필 내 눈에 잘 띄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사실은 내가 죽은 동물을 유난히, 유심히 보는 탓이었다. 어떤 경우엔 바라보고 지나쳤다. 어떤 경우엔 사체를 옮기거나 묻어주었다. 때론 사진을 찍었다. 사진기가 없어서 바라만 볼 때가 있었고, 사진기가 있지만 바라만 봐야 할 때도 있었다. 눈앞의 죽은 몸이 동물 아닌 사람이었다면 주저하거나 주저앉았을지 모른다.
죽은 동물을 덜 험한 곳으로 잠시 치운다 해서, 혹은 묻는다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없다. 그런데도 왜 그랬을까. 시각적 불편함의 제거? 잠시 바라본 것에 대한 답례? 죽은 자에 대한 막연한 미안함이나 예의?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래왔고, 그러할 것이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살아내는 것처럼. 모든 삶에 시효가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슬프고 두려운 일이지만, 실로 자연스럽다. 모든 죽은 것은 산 것을 노래한다. 산 자만이 죽음을 구경한다. 죽음을 아직 모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