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에 살어리랏다>는 대한민국 40대 가장의 모습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대학 시간강사인 중년 남성 오준구는 배우의 꿈을 놓지 않고 있다가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앞에 두고 갈등한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건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아니, 그건 나이보다는 차라리 대한민국이라는 상황의 문제에 가깝다. 5천만원이라는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애니메이션이 특별한 건 이 땅에 사는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고민들을 제대로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건 감독이 직접 보고 느낀 현실이라서 더욱 친숙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반도에 살어리랏다>로 장편 데뷔를 한 이용선 감독은 4편의 단편애니메이션을 연출한 베테랑이다. 전작인 단편 <화장실 콩쿨>로 2015년 11회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독립보행상, 관객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좀더 확장된 이야기로 돌아온 작품이 바로 <반도에 살어리랏다>다. <반도에 살어리랏다>에는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의 시간강사로 재직 중인 이용선 감독의 경험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오리지널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씨가 말라버린 이 땅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단편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그가 장편 데뷔를 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물었다.

-첫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적은 예산으로 제작했다.

=정확히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내 스스로의 필요가 있었다. 사실 <얼론>(2010), <기억하려하다>(2011), <거대한 태양이 다가온다>(2014) 등 3편의 단편을 만들고 나서 애니메이션을 계속할 수 있을지 위기가 있었다. 성과는 보이지 않고 ‘이제 그만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무렵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그게 <화장실 콩쿨>이었다. 이거다 싶을 만큼 반응이 왔고 그걸 기반으로 장편으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이 아니면 어렵겠다는 판단도 있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상황에서 몇년간 기획해서 힘을 모으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장편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가 선 이후에 작업 스타일을 연구했고 결과적으로 도달한 모델이 연상호 감독이다. 짧고 실용적인 제작 방식이 필요했다. 기획부터 완성까지 2년안에 마무리 짓는 게 목표였다.

-계획대로 2년 정도 걸린 셈인데, 어떻게 가능했나.

=기본적으로 기획개발은 1인 작업이다. 1년 남짓한 프리 프로덕션 단계는 혼자 다 했다. <화장실 콩쿨> 때 30분 분량의 작화 채색에 3명의 인원이 작업해서 넉달이 걸렸다. 규모를 조금 늘리더라도 7, 8개월이면 가능할 거라는 계산이 섰다. 캐릭터 등은 단편의 연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걸 기본으로 해서 제작비를 어느 정도 산정할 수 있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짜는 과정이 가장 즐겁다. 일단 제작에 들어가면 더이상 이야기를 수정 보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후의 작업은 약간은 단순노동에 가깝다. (웃음)

-<화장실 콩쿨> 이전과 이후의 스타일에 변화가 있다. 이전에는 그림의 표현을 통해 메시지를 형상화하려 했다면 <화장실 콩쿨>부터는 확실히 이야기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단순화된 작화가 눈에 띈다.

=이전의 3편은 다소 감성적인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내가 잘하고 즐기는 게 그쪽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무려 5년이 걸렸다. (웃음) <화장실 콩쿨>의 스토리라인은 다소 만화적인 부분이 있다. 움직임이 아니라 정지된 스틸 컷들로도 이야기가 연결된다. 무엇보다 코미디적인 요소를 넣고 싶었다. 거기에 공감할 수 있는 체험들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풍자풍의 블랙코미디가 된다. <반도에 살어리랏다>도 출발은 ‘심슨 가족’ 같은 시트콤의 분위기를 연상하면서 기획했다. 물론 코미디의 결이나 상황을 과장하는 방식에서 심슨과 차이가 있다. 아마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정서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본인의 장기를 십분 살릴 방향을 찾은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치밀하게 기획된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장기적인 비전 같은 걸 세우고 달려가는 타입이 아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고 사는 편이다. 대신 내 손이 닿는 범위 안에서는 최선을 다하려 한다. 애니메이션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입시미술을 지망하다가 이후 만화와 애니메이션 중에서 고른 거다. 원래는 만화를 하려고 했는데 점수에 맞춰서 대학 갔다. (웃음) 당시에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생각할 만큼 무지했다. 그건 아마 내가 그림보다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화장실 콩쿨> 이후로 절박함이 있었다. 계속 이 일을 하려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첫걸음이 이번 영화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오기 시작한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다. 일견 희화화로 보이기도 하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조금만 지나면 감독의 애정이 느껴진다.

=처음엔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외모 비하로 받아들여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됐고 장편애니메이션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우기엔 호감으로 이어지기 힘들 수도 있겠단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잘생긴 사람이 대접을 받는 건 너무 당연해서 재미없지 않나. 작품 속 오준구는 스스로에 대한 당당함이 있다. 외모에 노력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자존감이 높은 것이기도 하다. 외형보다는 본인의 책임이나 사회적 능력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40대는 스스로 이뤄놓은 것을 돌아보고 점점 좁아지는 선택지에 대한 성찰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겉멋이 사라지고 진실된 캐릭터가 나온다고 해야 할까. 거창한 이유를 접어놓고 고백하자면 개인적으로 심슨같은 아저씨 캐릭터를 좋아한다. 사랑스럽지 않나? (웃음)

-꿈과 현실 사이의 고민이라는 측면에서 <라라랜드>를 연상시킨다. 작품 속 오준구의 한풀이춤도 인상적이다.

=<라라랜드>를 패러디한 포스터는 마케팅 단계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만들고 보니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재미있었다. (웃음) 그것과는 별개로 데이미언 셔젤 감독을 좋아한다. 영향을 받았다면 <라라랜드>보다는 차라리 <위플래쉬>쪽이다. 단순한 이야기를 리드미컬한 템포 하나로 밀어붙이는 걸 보고 설명적인 요소를 이렇게 경쾌하게 풀어낼 수도 있구나 싶어 감탄했다. <반도에 살어리랏다>에도 그런 요소들을 녹여내고 싶어서 착안한 것 중에 하나가 춤이다. 본래는 한국적인 한풀이춤을 구상했는데 동생이 피나 바우슈라는 무용가의 춤을 모티브로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작화는 여러모로 아쉽지만 움직임이 주는 정서는 충분히 잘 풀린 것 같다. 덕분에 손이 등장하는 부분적인 실사연출 등 현실적으로 적은 예산을 돌파하기 위한 아이디어까지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지만 이룬 것들이 결코 적지 않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런 질문을 받으니 비로소 감독이 된 것 같다. 묘하게 기분 좋으면서 책임감도 생기고? (웃음) 스스로 ‘나는 감독이니까’라고 의식하면서 작업을 한 적은 없다. 직위가 사람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당장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꿈을 정하고 거기로 달려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목적 지향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저 내 주변에 놓인 것 중 제일 잘하는 걸 선택해 열심히 해왔다. 반대로 말하자면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들을 포기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작품 속 오준구는 딸에게 “돈 걱정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러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다. 내 경우엔 거창한 비전은 없지만 욕심은 많아서 매 작품 사소한 불만족에 시달리고 그때마다 그걸 해결하려고 발버둥친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다들 그렇게 산다. <반도에 살어리랏다>를 보며 공감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고민과 하소연들이 녹아 있기 때문일 거다. 한마디로 이건 한국에서 거의 시도된 적 없는 성인용 블랙코미디다. 형식이나 주인공 모두 생소한 접근이지만 일단 보면 금방 친숙함을 느끼실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