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이 되도록 합격의 기미도 없는 사법고시에 매달렸던 채미희(이상희)는 이제 시험을 포기하려 한다. 오랜 애인 오두민(이선호)과도 헤어졌다. 혼자 자취방에서 컵라면이나 먹는 삶은 적막하지만 가족이 사는 집에 들어가는 건 정신병에 걸릴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미희는 지하철에서 마주친 한 여고생(김새벽)의 뒤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쫓아간다. 미희는 고등학교 시절 유영의 단짝 친구였던 조성숙(홍승이)의 집에 도달하게 되고, 자신이 성숙의 과거 단짝 친구라고 성숙에게 얘기한다. 성숙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미희가 자신과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동거인 김익주(임형국)가 사는 집을 이따금 찾는 것도 그냥 놔둔다. 그 과정에서 미희는 익주와, 성숙은 두민과도 엮이게 된다.
‘누에치던 방’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배경인 잠실(蠶室)의 의미를 풀어쓴 말이기도 하다. 주공아파트 재건축부터 롯데월드타워의 입성에 이르기까지, 이 동네가 축적한 기묘한 분위기를 인간관계에 비유한 점이 참신하다. 추억의 장소가 사라진 자리에 화려한 최신식 건물이 들어선 풍경이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졌던 것처럼, 별것 아닌 일에도 실없이 웃게 만들던 단짝 친구들이 사라진 자리는 지독히 외롭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무작위로 오가며 직조되는 모호한 스토리라인은 마찬가지로 답이 없는 관계와 감정의 속성을 대변하는 형식이다. 필요 이상으로 구조를 복잡하게 만든 감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사라진 존재를 찾아나가는 여정에서 새로이 교감하게 된 두 여성의 연대가 남기는 한 조각의 희망은 충분히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