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험이 당신이라는 인간을 만들었을까. 소설가 캐서린 앤 포터를 만든 경험 중 하나는 그가 29살이던 1918년 미국과 유럽 전역을 휩쓴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다 살아난 일이었다. 단편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웨더롤 할머니가 버림받다>가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들이다.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의 제목은 성경의 요한묵시록 6장8절에서 따온 표현이다. “그러고 보니 푸르스름한 말 한필이 있고 그 위에 탄 사람은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지옥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캐서린 앤 포터는 <로키 마운틴 뉴스>에 취직해 기자로 일하다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소설의 여자주인공 미란다처럼.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한 소설집은 1939년에 출간되었으니(1932년 집필 착수),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꽤 멀리 항해한 뒤 그 경험을 반추하며 썼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소설은 시작하자마자 정신없다, 그 표현 말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잠결에 쏟아지듯 몰아치는 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감각- 빛, 박동, 촉감, 소리- 이 있고 그 사이로 두서없이 과거의 일이 솟아오른다. 설마 잠에서 깨어날 때 이런 착란에 가까운 상황에 빠진다고? 그녀의 상황을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그녀의 착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녀는 기자로 일하고 있다. 연극 담당 기자인데 그녀의 남자친구 애덤의 말을 빌리면, “네 직업은 참 희한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눈이 핑핑 돌 만큼 재밌는 것들을 구경하고, 그것에 대해 글 한쪽 써내고, 그게 다잖아.” 그런데 연극 지면 담당에 대한 경시는 그녀 자신도 공유하는 듯 보인다. ‘진짜’ 사건기자를 하던 시절, 취재원이 요청한 비밀유지에 충실했다가 다른 매체 기자들에게 ‘물을 먹은’(특종을 놓친) 뒤로 그녀와 동료는 ‘으레 여자들에게 맡겨지는 뻔한 기삿거리들만 취재하는 위치로 좌천’되어 연극계, 사교계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란다가 혼돈한 정신으로도 꼭 붙들고 있는 것은 연극도, 회사도 아닌 애덤이다. 그는 군인이고, 전장으로 향할 예정이다. 미란다는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듯 보이는데, 애덤을 만나러 갔을 때 혼자 앉아 있는 그를 묘사하는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굉장한 얼굴이었다. 미끈하고, 잘생겼고, 우중충한 조명 속에서 황금빛을 띤 얼굴. 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이, 고통스러운 긴장과 환멸감이 선명히 떠올라 있었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나이 든 애덤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영영 되지 못할 사내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착란의 정체가 드러난다. 1918년, 그녀는 독감에 걸렸다. 세상천지에 독감 환자뿐이다. 어떤 병원에 연락해도 빈 침대는 없다. 극장은 전부 문 닫았고, 가게나 식당도 거의 닫았다. 약을 삼킬 수조차 없는 미란다를 돌보는 이는 애덤뿐이다.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겨우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마침 애덤은 집을 비운 상태. 이 순간이 되어서야 분명해진다. 소설의 화자인 미란다는 독감으로 의식이 흐려진 상태다. 그간의 삶이 꿈처럼 기억처럼 현실처럼 열에 들뜬 그녀에게 쏟아진다. 거기에는 애덤에 대한 필사적인 그리움이 있다. 죽음은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잠시 의식이 돌아온 순간에는 의료진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의 가장 황홀한 대목은 사랑했던 장소의 풍경을 묘사할 때다. 감각만으로 존재하다가 현실의 육체로 빠져나오는 순간, 그 머리 지끈거리는 소음을 문장으로 옮길 때. 그리고 알게 된다. 그녀가 독감으로 착란에 가까운 의식불명 상태를 보이던 동안 애덤이 (전쟁이 아닌) 인플루엔자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20년 전 아주 어렵게 원서를 구해 읽어야만 했던,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 캐서린 앤 포터의 작품집이 한국에 정식 출간되었다.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를 처음 읽고 내용을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생각이 난다. 모든 문장의 의미가 강렬해 전체를 보기 어려웠던 미성년의 시기. 이제 와 다시 읽으며, 착란 속에서나 인정할 수 있었을 갈망과 그리움, 욕망이 뒤범벅된 혼란스런 마음의 지도를 알아차린다. 여성의 마음을 글로 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