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이 넘쳐흐르되 입은 삼가라.” 특히 화를 가라앉히는 게 중요하다. “화가 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가로막거나 대답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화를 멀리해라. 자신을 통제해야 한다.” 이것은 4천년 전 이집트 고관 프타호텝이 사회적 우아함의 문제에서 자제심의 중요성을 논한 부분이다. 무용 비평가 사라 카우프먼의 <우아함의 기술>은 우아함이라는 화두를 풀어간다. 자제심 없는 사람이 우아해 보이기란 불가능할 테니 새겨들을 말이다. 그런데 대체로 우아하다는 말은 “느긋하고 균형 잡힌 몸, 매끄럽고 효율적인 움직임, 관심과 연민, 자족적인 침묵”을 뜻한다. 몸과 움직임의 전문가인 무용 비평가가 우아함에 대해 논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만큼 작심삼일마저도 되지 못하는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멀고도 먼 단어다.
현대무용 안무가 폴 테일러는 걸음걸이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골반에서 정직성을 본다!(“걸음걸이를 보고 조지 부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우아하게 걸으면 신체에 자연스러운 균형이 생기는 건 사실이지만 움직임을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일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우아함은 타고나는 문제가 아니라 학습과 자제의 문제이며 많은 경우 환경과 관련된 이슈다. 예를 들어 사람들과 소통을 잘하며 자신감 있어 보이고 침착한 사람의 예시는 존 웨인이다. “느릿하고 우아한 태연함.” 사라 카우프먼은 묻는다. “걸음걸이가 그렇게 씩씩하지 않았다면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까?” 뭐라고? 조지 워싱턴의 움직임과 제스처가 우아했고 걸음걸이가 위풍당당했다면 그것은 한 인간에게 매우 근사한 일이고 정치가에게는 홍복이겠으나,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아버지가 된 것은 걸음걸이 때문이 아니다. 종종 이 선후관계를 혼동하고 인과관계를 잘못 부여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자외선으로 인한 피부의 노화와 손상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블록을 열심히 바르고 양산을 쓰는 게 아니라 자외선에의 노출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야외에서 장시간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얼굴이 그을리거나 잡티가 많다고 해서 그의 자기관리 능력을 깎아내리는 일이 불합리한 것과 마찬가지. 그러니 우아한 태도가 그 사람의 메시지까지 우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몹시 투덜거리고는 있으나, 우아하고자 하는 생각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우아함의 기술>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우아함은 ‘관계’를 중시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남들 보기에 많은 것을 갖추었다고 우아해지지 않는다. “우아함은 도전·갈망·용기를 통해 얻어집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낼 때죠. 인생은 엿 같고 힘들 수 있어요. 그러나 우아함은 인생의 양면을 다 보는 것입니다.” 타인의 우아함에 눈길이 갈 때를 떠올려보라. 모든 게 좋은 환경에서 물흐르듯 유연한 사람을 볼 때의 감탄이 있는가 하면, 안 좋은 상황에서 인간의 품격을 잃지 않고 차분하게, 그 자신에게 충만한 사람을 볼 때의 감탄도 있지 않던가. 너 자신을 알라, 그리고 자신을 통해 바깥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시기에 독일에 있었다는 사라 카우프먼은 역사적인 1990년 10월3일의 다음날 베를린의 풍경을 말한다. 모든 연령층의 독일인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동베를린이었던 곳까지 쭉 뻗어 있는 운터 덴 린덴이라 불리는 넓은 가로수길을 따라 산책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가는 이들 대부분이 옷을 잘 갖춰입고 있었다. 교회나 브런치 모임에라도 가는 것처럼, 멋진 스카프를 두르고 모자를 쓰고 좋은 외투를 걸친 모습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우아하게 알리고 있었다.” 나 자신에게 우아한 태도를 보이기, 우아한 태도로 세상을 대하기. 나아가 “즐기고 위험을 감수하는 걸 겁내지 않는 것”.
이쯤에서 알 수 있겠지만 여유가 없이는 우아함은 엄두도 낼 수 없다. 당장 답해야 하는 카카오톡 메시지의 알람, 충원되지 않는 인력으로 인한 상시적 과로, 월급인상률을 늘 초과하는 물가인상률과 집값인상률 속에 우아하기란 너무 어렵다. 부디 2018년에는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우아함이 깃들 수 있는 여유가 함께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