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좋아하는 아이돌이 생겼다. 얼마 전 한 영화상 축하 무대에서 노래 가사를 영화 속 명대사들로 재치 있게 바꿔 부르는 그들을 처음 보았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관객일 영화인들을 앞에 두고도 그들은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거침없이 뽐냈고, 다정하고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며 호응을 이끌어냈다. 라이브마저 끝내주는, 여러모로 신박한 무대였다. 특히 내가 반한 포인트는 그런 내 멋대로 내 식대로 놀아보겠다는 당찬 태도의 멋과 아름다움이었다. 자신들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또 누구보다 즐겁게 표현하고 주장하는 그들의 모습이 요즘 여러모로 의기소침해 있던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후 한동안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들이 출연한 방송 영상들을 돌려 보면서 빡빡한 일과 속에서도 숨을 고르며 웃는 일이 많아졌다. 왠지 모를 자신감도 조금씩 생겨났고 일도 일상도 더 재밌어졌다. 실제로 나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사실 10대 시절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온 정성을 다해 당대의 아이돌들을 사랑하는 열성팬이었다. 좋아하는 대상은 쉼 없이 바뀌었지만 한번 빠지면 정신없이 파고들어 지지했고 어떻게든 팬심을 전하려 애를 썼다. 신나고 아찔한 일도 많았다. 언젠가는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수차례 갈아타면서 생판 모르는 동네로 모험 가득한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또 다른 늦은 밤엔 스타를 기다리다 대중교통이 끊기고 폭우까지 쏟아져 한참을 오들오들 떨다 뒤늦게 부모님께 살려달라고 전화를 건 적도 있다. 힘이 남아도는 10대여서가 아니었다. 힘을 받은 10대여서 그럴 수 있었다.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과 생각들을 어떻게 꺼내놓아야 할지 알 수 없던 시절, 알아도 마음껏 펼쳐 보일 어떤 기회나 힘도 주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 그들은 내 언어가 되고 내 목소리가 되고 내 몸짓이 되어주었다. 때로 그들은 친구들보다 더 나를 따스하게 위로해주었고 가족들보다 더 나를 믿고 응원해주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표현해주었다. 그 시절 내게 그 언니와 오빠들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더 자주 외롭고 더 많이 괴롭고 더 깊이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그들이 내 삶 깊숙이 파고들어 나와 함께해주었고 나는 그들의 노래와 춤과 연기와 미소와 그 모든 것들 덕분에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 즐겁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토록 뜨거운 마음을 그렇듯 온 힘을 다해 전할 수 있을 만큼 나는 하루하루 더 튼튼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나는 실제로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다.
며칠 전 정신없이 흔들리던 나의 20대에 잠시나마 큰 위로가 되어주었던 한 아이돌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이제 더이상 내 삶의 에너지가 될 스타는 없는 건가 싶을 때 만난 참 좋아했던 그룹의 멤버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읽고 한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많은 팬들의 삶을 빛나게, 건강하게 만들어주었던 사람이 그토록 외롭게, 아프게 지쳐갔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가 그토록 듣기 원했던 그 세 마디는 어쩌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능한 한 자주, 진심을 다해 전해야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이렇듯 큰 위로의 말을 전해주고 간 그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그의 가는 길에나마 정말 수고했고 고생 많았고 그동안 참 잘해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