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무슨 에어앤비의 광고 문구 같다. 이는 많은 여행자들의 로망이기도 할 것이다. 짧은 휴가 동안 꼭 봐야 할 관광지에 발자국만 찍고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충분히 머무르며 생활인으로서 살아보는 것. 더구나 그곳이 자연과 도심이 어우러져 있으며, 동네 사람들은 더없이 다정해 건널목에 잠깐 서 있는 동안에도 미소와 인사가 끊이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은 ‘퐅랜’(Potland)이다. <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의 표지를 받아들고 퐅랜을 ‘플랜’으로 잘못 읽었다. 포틀랜드를 ‘퐅랜’이라 부르는 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2월에서 1월로 해가 넘어가는 시기에는 ‘플랜’만큼 자주 눈에 띄는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별거 아닌 오해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플랜’과 ‘퐅랜’은 오억 광년만큼 먼 사이라는 생각이 든다. 퐅랜(포틀랜드를 이 책에서는 퐅랜이라 부른다)은 꽉 짜인 계획표 따위 집어치워도 될 것 같은 여유가 온 도시에 스며들어 있고, 계획 없이 골목을 헤매다가도 헌책방과 빈티지 숍에서 보석 같은 음반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니까. 만화가 이우일과 그의 아내이자 작가인 선현경은 매일 출근할 필요가 없는 프리랜서이다. 이들은 딸 은서와 함께 훌쩍 어딘가로 떠나고 그곳에서 살며 일을 한다. 디지털 유목민처럼 떠도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일정 기간 타지에 정박하고 거기서 온전히 생활인으로 살아간다. 퐅랜을 가로지르는 윌래밋 강변에서 달리기를 하고, 주말엔 집 근처의 파머스 마켓에서 장을 본다. 딸과 함께 누드 크로키 수업을 매주 받으러 다니고 서울에서 함께 떠나온 반려묘 카프카는 퐅랜에서도 골골대며 거실을 돌아다닌다. 파월북스의 에스프레소 북 머신에서 딸의 첫 책을 손수 만들어주는 부부의 이야기까지 읽고 나면 그들이 저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프리랜서라서가 아니라 어디서도 저들만의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이라는 부제는 그래서 정확하다. 포틀랜드에서 살아보고 싶다. 그리고 내일은 어찌되었든 내 집 앞을 산책하며 새로운 발견을 해야겠다. 마지막장을 덮고 다짐한다. 어쨌든 새해의 첫 다짐이다.
퐅랜이기에 할 수 있는 일
주 은서랑 같이 누드 크로키를 다닌다는 건 정말 멋진 경험이다. 서울에서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나는 나대로 은서는 은서대로 바쁘고, 항상 뭔가 각자 해야 할 일들이 넘쳐났다. 퐅랜이라서, 퐅랜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퐅랜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45쪽)
나는 작고 아담한 이 도시가 좋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크기가 안정감을 준다. 퐅랜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은 도시이고, 그래서 살아보니 정이 간다. 나와 이 도시를 조화시킬 수 있다는 느낌이다.(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