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마치 흐르는 물처럼 당연했던 일들도 이제와 생각해보면 갸우뚱한 게 많다. 예컨대 끽연의 풍경. 어린 시절 기억엔 버스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대던 아저씨들의 모습이 또렷하다. 좌석 등받이엔 그들을 위한 재떨이마저 붙어 있었다. 10여년 전만 해도 식당과 주점 안은 너구리를 잡는 굴 같지 않았나. 나 또한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아무 데서나 담배를 입에 물곤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왜 아무렇지도 않았던 걸까. 감각은 인식의 숫돌 위에서 날을 벼린다. 한때 당연했을지라도 오늘은 아닐 수 있다. 오늘 당연한 어떤 것은 내일 부인될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시내의 노래방들은 방 안에 CCTV를 달고 손님들이 노래하며 노는 모습을 길가에 설치된 모니터로 중계하곤 했다. 행인들은 신나게 노래 부르는 그 모습에 이끌려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길가에 서서 한참을 구경하곤 했다. 거북했을까. 거북하지 않았다. 왜 거북하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 그 풍경은 사라졌다. 사라지는 게 당연했다. 그 사라짐은 왜 당연할까.
20세기에 가장 사랑받고 주목받았던 저널리즘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의 다수는 거리에서 찍은 것이었다. 사진가들은 거리와 광장을 활보하며 셔터를 눌러댔고, 찍히는 사람들은 우호적이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현대사진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로버트 프랭크도 그런 식으로 사진을 찍었고, 워커 에반스는 카메라를 옷 속에 숨기고 뉴욕 지하철의 풍경을 담았다. 당연한 시대의 그 작업들은 ‘예술작품’으로 승인되었다. 오늘도 가능한 일일까. “공공장소에서 남의 모습을 (허락 없이) 찍는 것은 범죄”인 시대에 그런 작업방식은 위험하다. 누구에게 위험한 것일까.
사람을 찍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즐겁다. 실은 두렵다.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범죄일 수 있다는 인식을 할 수 없었던 시대에도 사람 찍는 일의 두려움을 알아챘던 이들이 있었다. 그 예민함은 그 시절엔 과했을지 모른다. 허나 오늘 그것은 의무가 되었다. 당연한 일일까. 같은 두려움이라지만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