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연기됐다. 꿈이 아니었다. 사실 꿈에서야말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난 아직도 스트레스가 많은 날이면 수능 보는 꿈을 꾼다. 레퍼토리는 한결같다. 다시 학생이 된 나는 들떠서 학교에 간다. 친구들과 신나게 논다. 누군가 갑자기 내일이 수능날이라고 말한다. 가만 보니 다들 알고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다. 여기서 1차 멘붕. 발을 동동 구르며 집에 간다. 다급하게 되지도 않는 벼락치기를 시도한다. 이제 덧셈뺄셈도 헷갈리는데 어떻게 미적분을 풀어. 그래도 밤새 문제집을 놓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만회하려 안간힘을 쓰다 어느새 아침이 밝는다. 가장 피곤하고 우울한 상태로 등교한다. 하필 수학이 첫 교시다. 시험지를 받는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한 시간이 넘도록 두 문제 이상 풀지 못한다. 갑자기 종이 울린다. 그제야 정신없이 몇 문제 찍어보는데 답안지를 걷어간다. 헐~ 망했다. 이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엄마한텐 뭐라고 말하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눈물이 솟구친다. 바로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 늘 똑같다. 기어코 시험을 봐야지만 끝이 나는 꿈이다.
어쨌든 이번 일은 꿈이 아니었다. 수능을 하루 앞둔 2017년 11월 15일 2시경, 포항지역에서 5.5 규모의 지진이 일어났다. 유리창이 깨지고 건물 벽이 갈라지고 무너져내렸다. 서울에서도 여진을 느낄 만큼 강력한 규모였다. 그리고 정확히 6시간 후 정부는 수능을 일주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내겐 지진보다 놀라운 사건이었다. 정부의 발빠른 대처에 그 현명하고 용감한 결정에 감탄했고,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또 좀 이상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충격적으로 감동받을 일인가.
그렇게 큰 지진이 일어났는데, 또 언제 다시 일어나 시민들의 생존을 위협할지 모르는데 시험 연기 정도는 너무 당연하고 마땅한 선택이 아닌가. 혹여 다수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피해를 입은 소수를 위해 잠시 멈추고, 돌아보고 일으켜 함께 가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게 정의 사회 아닌가. 언제나 사람이 먼저가 아닌가. 대체 난 얼마나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살아왔기에 그런 기본적인 원칙도 지켜지지 않을 거란 본질적인 의심을 품게 된 걸까.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결정들에 이렇듯 기뻐하고 감격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부터라도 당연히 지켜야 할 가치들을 당연하게 주장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건 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어쨌든 일주일 뒤 수능은 치러졌다. 몇 차례 여진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지나갔다. 정정한다. 이것 또한 무사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며 살아왔을 청춘들의 미래가 단 하루의 운명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비극이 아닌가. 그런 불합리한 체제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 아직도 악몽을 꾸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단 말이다.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아주 오랜만에 조금 희망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