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슬럼프’는 스포츠나 예술 분야 종사자의 기량이 일시적으로 정체에 빠진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최근 이 슬럼프가 게으름이나 무기력을 뜻하는 일반 용어로 자리잡아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경우에 “요새 슬럼프야”, “인생이 슬럼프야”라는 자책 어린 표현을 한다.
슬럼프는 그저 할 일을 안 하는 불성실한 상태가 아니다. 옛날 옛적, 누구나 일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성실함이란 “주어진 일에 전념하는 태도”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여기서 일이란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 수행하는 역할이었다.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는 자는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역사는 흘렀고 사람들은 대꾸하기 시작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을 못하는데 먹지도 말라니, 너무 가혹하군요.” 그러자 새로운 말이 나왔다. “게으른 자는 먹지도 말라.” 일이 없다면 적어도 일을 구하기 위해 성실히 준비하고 노력해야 하며, 그러지 않는 자는 여전히 공동체에 해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실함 혹은 그 반대인 나태함의 핵심에는 ‘일’이 있었다. 일에 임하는 태도란 결국 공동체를 향한 개인의 헌신 정도를 뜻했고, 한 사람의 “밥 먹을 자격”은 이 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옛날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1960년대에 직업(job)과 커리어(career)를 개념적으로 구분했다. 고프먼에 따르면 직업만 있는 사람은 퇴근 후 집에서 일을 하지 않지만 커리어가 있는 사람은 퇴근 후에도 일에 빠져 있다. 커리어에서 성공한 사람의 삶은 역설적으로 커리어에 의해 잠식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고프먼의 커리어 개념은 확장될 필요가 있다. 커리어가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커리어로 변해버렸다. 성실함이 궁극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직업/공동체가 아니라 ‘자아’이다.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경제적인 영역에서도 탁월성과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성실히 책을 읽고, 성실히 운동을 하고, 성실히 소셜 미디어에 참여하고, 성실히 여행을 가고, 성실히 휴식해야 한다.
이제 삶 전체는 무수히 겹치고 교차하는 경주 레인들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그 레인들 위에서 멈춤 없이 달려야 한다. 이 달리기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독한 마라토너”의 그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차라리 그것은 “달려!”(Run!)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무 데서나 질주를 시작하는 ‘포레스트 검프’나 ‘플래시’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바보 영웅도, 플래시처럼 슈퍼히어로도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달린다. 그런데 우리에게 달리라고 명령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의미 있는 타인도, 공동체도 아닌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어. 너는 지금 지체돼 있어.”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죄의식에 빠진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불안에 시달리며 달릴 채비를 한다. 이 글을 쓰기로 맘먹은 날, 나는 거리에서 조깅하는 사람을 보았다. 횡단보도의 불이 정지신호로 바뀌자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런지 자세로 신발끈을 다시 묶었다. 나는 그런 멋진 자세로 신발끈을 묶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멈춰 있을 때도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과 몸짓은 광고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신호가 바뀌고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카피 하나를 떠올렸다. “달리는 당신, 슬럼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