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다루는 가까운 미래의 유럽은 대기업들의 주도로 거대한 도시 국가 형태로 운영된다. 방사능으로 인한 영하의 기온과 가뭄에 굶주리는 시대, 주인공 시리우스 베케르(올라 라파스)가 살고 있는 곳은 프로메테우스 기업의 지배를 받으며 빈부 격차에 따라 구역이 나뉜다. 특히 극빈층이 거주하는 ‘계단’ 공간과 그들이 유희를 즐기는 ‘일탈’ 공간이 영화의 특징적인 배경이다. 경찰인 시리우스는 어느 군인의 총격사건을 맡으면서 신종 마약을 발견하고, 이것이 프로메테우스 기업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에 친구들과 마약을 즐기던 딸 루가 얽히면서 시리우스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인 수사를 시작한다. 건조한 태도로 맡은 임무에만 충실했던 경찰이 개인적인 사건을 계기로 각성한 뒤 부패한 조직에 맞선다는 설정은 분명 누아르 장르의 매력적인 출발일 것이다. “모든 것을 순응하거나” 혹은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만이 가능한 세계에 절망한 영웅은 점차 과묵한 분노를 키워 나간다. 그러나 영화는 SF를 기대한 관객에겐 이렇다 할 새로움을 주지 못한다. 잿빛 먼지로 뒤덮인 도시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창조적 구현으로 보기 어렵고, 배경 묘사 외에는 별다른 SF적 설정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액션과 스릴에 집중하는 편이 좋을 듯싶지만 이 부분에선 <섹션제로-3구역>이 프랑스 TV시리즈를 극장판으로 재편집한 버전임을 미리 일러두어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와 카오스 사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타락한 유럽을 바로잡으려는 ‘섹션제로’ 집단 역시 너무 늦게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