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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의 생을 그린 <조용한 열정>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송경원 2017-11-22

시가 된 영화, 영화가 된 시

“이것은 한번도 답장하지 않은/ 세상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 자연이 부드러운 당당함으로/ 전해준 소박한 소식이다./ 그 소식은 내가 볼 수 없는 손에게 맡겨진다/ 다정한 동포들이여 자연을 사랑하듯/ 나도 후하게 판단해주길.” 에밀리 디킨슨은 은둔자로 불리며 당대에는 평가받지 못했지만 이후 시대를 앞서간 문학적 감수성으로 숱한 영감을 남긴 19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called back”(불려갔음)이라는 단순하고도 피할 수 없는 문장을 묘비명에 새긴 것처럼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고 솔직하다. <조용한 열정>은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담은 전기영화다. 유년 시절부터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담아냈지만 테렌스 데이비스의 영상으로 표현된 삶은 여느 일대기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표면화된 서사가 아니라 시의 아름다움을 담은 영화는 생생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눈을 돌리기 힘든 마력이 있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써내려갔던 시인의 삶은 어떻게 시가 되었을까. 시도, 영화도 아름다움은 그 끝에서 통한다.

영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표현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56년을 산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하나의 손실 없이 이해하려면 56년 동안 찍은 필름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그게 불가능하기에, 축약을 한다. 축약이란 결국 배제다. 불필요한 부분을 자의적인 판단 아래 제거하는 것이다. 어떤 정성을 들인다 해도 창작자에 의한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본래의 형태와는 달라진다. 다시 말해 완벽한 전기영화라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쩌면 실존 인물을 다루는 모든 영화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대상의 형태를 규정짓고 오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피치 못한 축약과 왜곡에서 벗어날 유일한 가능성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시다. 에밀리 디킨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는 “진실을 압축하는” 작업이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그대로 찍어내고자 하는 판화가 아니다. 단어의 배열, 문장의 형태, 시의 호흡을 거쳐 순간의 감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에 가깝다. 은유된 문장들은 읽는 이의 해석을 거쳐 각각 다른 가능성으로 발화된다. 시를 읽는 일은 일종의 교감이다. 우리는 시라는 문을 통해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고 그때 당시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인간이 느꼈던 감정에 맞닿는다.

에밀리 디킨슨이 쓰고, 테렌스 데이비스가 찍은 영상시집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이 그린 에밀리 디킨슨의 전기영화 <조용한 열정>은 삶을 찍어낸 영화라기보다는 삶에 조응하는 한편의 시라고 부르고 싶다. 이 영화는 에밀리의 유년 시절부터 죽음까지 일대기를 담고 있지만 삶의 궤적을 충실히 따라가는 여느 영화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테렌스 데이비스가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관계자들이 즉각 은둔자에 관한 영화를 어떻게 만들 거냐고 반문했을 정도로 에밀리 디킨슨의 인생은 겉으로 알려진 사건이 거의 없다. ‘과격한 개인주의자’라는 평을 받았던 에밀리 디킨슨은 메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집을 떠난 적도 없다. 그녀는 외부와의 관계를 거의 끊고 철저히 은둔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가 사회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건 아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일생에 걸쳐 거의 하루에 한편씩 시를 썼고 1800여편의 시를 통해 세상에 자신을 알려왔다. 그녀는 세상이 잠드는 고요한 새벽마다 시를 썼다. 평생 집을 떠나본 일이 없지만 영감은 넘쳐났다. 그녀는 가족과의 갈등과 애정,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 기독교의 폭력적인 권위 등 시대에 저항했던 자신의 감정에 대해 썼다. 죽음과 어둠, 생의 무력감,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 등 실존적인 깨달음에 대해서도 썼다. 꽃과 벌, 자연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고 썼다. 그렇게 모든 시가 삶이었고 그녀가 버텨낸 시간이었으며 에밀리 디킨슨이었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은 에밀리 디킨슨이 겪은 사건들을 재구성하고 찍는 대신 그녀의 시를 찍는 쪽으로 연출의 가닥을 잡는다.

<조용한 열정>은 에밀리 디킨슨의 전기영화라는 딱딱한 틀 안에서 설명하기 곤란하다. 차라리 에밀리 디킨슨의 영상시집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이 영화에는 흔히 말하는 기승전결의 서사적 구조가 없다.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고 간혹 장면마다 점프하는 상황도 맥락이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갑작스럽다. 원인과 결과의 흐름으로 사건을 구성하는 대신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는 에밀리 디킨슨의 감정들을 조각조각 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에밀리 디킨슨의 기숙학교 생활부터 출발한다. 아마도 강요된 질서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속죄와 회개가 의무라는 원장 앞에서 에밀리는 “깨닫지도 못한 죄를 어떻게 회개하나요”라며 홀로 반항한다. 바로 다음 장면,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창밖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에밀리의 뒷모습이 보인다. 카메라가 느리게 에밀리를 향해 클로즈업됨과 동시에 에밀리 디킨슨의 목소리로 한편의 시가 낭송된다. “모든 황홀한 순간엔 고통이 대가로 따른다/ 황홀한 만큼 날카롭고 떨리도록/ 사랑받은 시간만큼 비참한 수년/ 치열하게 싸운 동전들 눈물 가득한 금고.” 이 시가 에밀리 디킨슨의 감정의 표현인지 상황의 묘사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평생토록 깊숙이 침잠해 탐색했던 삶에 대한 실존인지는 중요치 않다. 장면은 원장 선생의 강요처럼 특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화면과 관객 사이에는 오직 시적인 이미지의 순간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요하게 펼쳐진 이미지와 내레이션은 관객에게 완전히 열린 감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이 한편씩 영상으로 옮겨지고 쌓여나간다.

솔직히 말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건이라고 해봤자 가족간의 갈등 정도이고, 공간이라고 해봐야 집과 애트머스의 산책길 정도가 전부다. 제목처럼 고요하게 흘러가는 영화는 에밀리 디킨슨의 내면에 흐르는 격정과 열정을 극적으로 표출시키는 무리는 범하진 않는다. 대신 에밀리 디킨슨이 남긴 시를 내레이션 형식으로 풀며 상황과 매치시킨다. 그녀의 시에는 제목이 따로 없다. 그날의 겪고 듣고 품었던 세계를 고요한 새벽에 언어의 형태로 옮겨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정확히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우주와 그녀를 둘러싼 19세기라는 세계가 충돌하는 기록들이다. 기독교 중심의 가치관과 여성을 철저히 억누르고 가두었던 당시의 사회는 그녀에게는 감옥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집과 가족은 에밀리 디킨슨의 영혼을 보호하는 유일한 장소였다. 에밀리 디킨슨은 은둔을 한 것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투쟁을 이어간 셈이다. 기숙학교를 떠난 그날부터 그녀의 투쟁은 이어진다.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예민한 영혼과 19세기 미국, 두 세계가 때로는 불협화음을 내고 때로는 조화롭게 하모니를 이룬다. 그 모든 순간들이 시의 언어를 통해 발현되면 테렌스 데이비스는 전기영화의 서사에 개의치 않고 이를 하나하나 화면 위에 조각해낸다.

진실을 압축하는 이미지들, 절대적인 아름다움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19세기 최고의 미국 시로 재발견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주목하고 싶은 건 단어의 응축과 이미지즘적 스타일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군더더기가 없다.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걸 결코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감성을 곧잘 사물에 빗대어 표현했다. 그 묘사들은 그림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가령 짧게나마 마음을 빼앗겼던 워스워즈 목사와의 만남 뒤 이어지는 시는 환희에 가득한 그녀의 심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가을에 그대 오신다면 여름은 훌훌 털어버릴래요/ 미소와 콧방귀로 파리를 쫓듯/ 일년 뒤 그대 오신다면 각 달을 공처럼 말아/ 서랍에 넣을래요. 때가 올 때까지/ 만약 더 늦어진다면 손 위에서 셀게요/ 그러다 손가락이 나락에 떨어질 때까지/ 만약 이 생이 끝나고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이 생은 벗어버리고 영원을 맛볼래요.” 당대 상황에서 유부남 목사에게 마음을 품는 것을 두고 동생 비니는 경악하지만 에밀리 디킨슨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한 적이 없다. 그녀의 시가 진실을 압축하고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시대에 저항하고 세상에 상처 입은 모든 순간들을 언어로 옮겨 담는 것이 에밀리 디킨슨이 숨을 쉬고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테렌스 데이비스는 그 시간의 호흡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느리고 세심한 카메라로 담아낸다. 여느 영화에서는 결코 보여주질 않을 잉여의 시간들, 멍한 표정들, 비어 있는 순간들이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주인공처럼 담긴다. 흐느끼는 어깨의 뒷모습, 어머니의 손을 잡은 힘없는 손길, 디킨슨이 병을 앓는 순간까지 한 호흡 더 길게 응시한다. 카메라는 인물의 격앙된 감정이 아니라 세계와 충돌하는 시의 형태, 시가 태어나는 순간의 호흡을 담기 위해 그 자리에 조금 더 머무는 것이다. 미묘한 표정과 제스처를 잡아내기 위해 오래 머무르고 무심하게 공간을 가로지는 카메라가 일견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영상시집이라고 생각하고 각 시퀀스들을 끊어서 감상해보면 전혀 다른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대기이되 일대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생을 따라가되 시가 탄생하는 순간에 방점을 찍고 한줄에 꿴다. 어떤 장면은 슬프고, 어떤 시는 애잔하고, 어떤 시는 푸근하고, 어떤 시는 황홀하다. 때로는 두세 가지가 동시에 이뤄지기도 한다. 에밀리 디킨슨이 시를 통해 영혼의 모양을 새겨 넣었다면 테렌스 데이비스는 시적 이미지를 통해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압축한다. 그래서 전체를 보면 일견 불균질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지나치게 완벽한 게 아닌가 느껴질 정도다. 그렇다. 테렌스 데이비스의 카메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마찬가지로 ‘진실을 압축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가족과 집, 브라일링 버펌 같은 극소수의 우정 안에서 자신을 지켜오던 에밀리 디킨슨의 세계는 이별의 연속에 놓여 있다. 새로운 만남이 힘겨웠던만큼 익숙했던 것들과의 이별은 세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마음이 맞지 않던 고모가 죽고, 유일했던 친구가 결혼과 함께 떠나고, 이해와 반목을 반복했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또한 죽는다. 세계의 분열 앞에서 그녀의 영혼도 조금씩 찢어진다. 그럼에도 에밀리 디킨슨은 신장염으로 56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통과 균열의 흔적을 새기는 데 눈돌리지 않았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해방의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떠나가고 홀로 남겨질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는 에밀리 디킨슨에게 그것은 저주이자 축복이다. 그 축복은 전쟁 같은 자존을 통해서만이 유지된다. 새벽녘 혼자 시를 쓰고 있던 에밀리에게 오빠의 아내 수잔이 찾아와 말한다. “너에겐 시가 있잖아.” 에밀리는 화답한다. “너에겐 삶이 있잖아. 난 그저 일상이고. 구제불능에게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선물.”

에밀리의 시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여성으로서 시대와 전쟁을 벌였던 인간의 열정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고통의 산물이기도 하다. 에밀리 디킨슨도 시대에 순응하며 행복을 갈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고, 예민하며, 고고했다. 그 영혼의 형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름을 붙일 수는 있을까. 극중 결혼한 오빠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에밀리는 갓난 조카 아기를 품에 안고 읊조린다. “난 아무도 아녜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도 아무도 아닌가요. 그럼 우린 같은 처지네요. 말하진 말아요. 사람들이 알면 쫓아낼 테니. 누군가가 된다는 건 너무 우울해요.” <조용한 열정>에 어떤 묘사를 갖다붙이더라도 말이 무기력해질 것이다. 이 영화에는 압축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한 인간의 생이 담겨 있다. 모든 드라마와 극적 순간을 비껴가는 것 같지만 실상 그 묘사들이 너무도 생생하고 고통스러워 계속 바라보고 있기 힘들다. 동시에 그렇기에 영화가 내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여기 시가 된 영화, 영화가 된 시의 힘을 빌려 온전히 한 사람의 생을 목격한다.

영국의 영상시인 테렌스 데이비스

테렌스 데이비스는 1988년 장편영화 <먼 목소리, 정지된 삶>으로 데뷔한 이래 29년간 겨우 8편의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았을 뿐이다. 매우 신중하고 느리게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그 미학적 성취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영국의 작가 감독이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거나 직접 각본, 각색을 하는 그는 시적인 은유가 돋보이는 영상 스타일로 주목을 받는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른 것”이라는 주장을 해온 그의 영화는 선형적인 서사 전달보다 영화적 형식의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데뷔작을 비롯한 초창기 작품들이 리버풀에 주목했다면 최근 테렌스 데이비스가 심취한 대상은 여성의 삶이다. 2000년 <환희의 집>, 2011년 <더 딥 블루 씨>는 물론 2015년 <선셋 송>까지 억압받아온 여성에 대한 관찰을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애초에 영화를 통해 스크린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가 시인 에밀리 디킨슨에 이끌린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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