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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37> 신연식 감독 - 이건 복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노골적인 종교영화다
송경원 사진 최성열 2017-11-15

<로마서 8:37>은 신연식의 영화다. 신연식이 직접 제작, 투자, 각본, 연출을 모두 도맡은 신연식의 영화다. 믿음에 대해 고민하는 자, 죄를 짓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자, 기도에 기대어 믿음을 타인에게 맡겨버린 자 등 종교를 대하는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의 본질에 파고드는 이 영화는 한국 교회의 불편한 민낯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회 고발이나 상업영화의 작법과는 거리가 멀다. 신연식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겨보는 “노골적인 종교영화”다. 때문에 작가 신연식의 매우 개인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로마서 8:37>은 작가로서 신연식 감독이 품고 있는 화두, 기독교인으로서의 물음과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각본가로서의 이야기를 조탁하는 솜씨는 물론, 연출, 제작까지 두루 거치며 쌓아올린 경험치가 오롯이 이 한 작품에 집중되어 있다. 그 결과 온전히 한 사람의 영화가 된다. 동시에 그렇기에 종교에 관한 보편타당한 질문들이 단지 소비되는 것을 넘어 이전까지의 종교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깊이에 다다른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로마서 8장37절의 의미에 대해 신연식 감독에게 물었다.

-그간 영화에 기독교적인 코드를 녹여왔는데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종교영화를 연출했다.

=종교영화를 찍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선전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건 아니었다. <로마서 8:37>은 굳이 표현하자면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영화다. 복음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죄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한국 교회의 실상에 대한 취재를 시작했다. 대략 5년 전부터 이야기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한국 사회, 한국 교회의 상층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게 될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계속해왔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마친 후 온전히 내 힘으로 제작할 수 있는 타이밍이 왔다. 현실적으로 그때가 아니면 어려울 것 같은 게 있었고,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수 있을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외면하고 싶진 않다.

-영화의 태도가 단호한 만큼 관객 반응은 확연히 갈릴 것 같은데.

=원래 관객 반응을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지만(웃음), 이 영화만큼은 사회적인 공분을 일으키거나 상업적인 관점으로 소비되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직접 투자하고 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건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관한, 노골적인 종교영화다. 관객 반응에 대해 의식하는 건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부조리에 대해 공감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확인하는 정도다.

-사실 종교영화라는 개념이 모호하다. 그간의 종교영화들은 단순히 종교를 소재로 삼는 것에 그쳤다면 <로마서 8:37>은 기독교적인 화두나 교리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고 파고든다는 인상이다.

=극영화로는 제대로 된 종교영화라는 게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선례나 사례도 없었다. 막막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서 더 제대로 깊이를 더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자료조사도 오래했고 생각도 오래 품고 있었지만 실제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서 찍기 전까지 100일이 걸리지 않았다. 스탭들이 이준익 감독의 <박열>(2017)에 합류해야 하는 물리적인 상황도 있었지만 그때 그런 압박이 없었다면 영원히 못했을 거다. 사실 이런 화두를 품고 있는 것 자체가 창작자로서는 고통이다. 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는 또 전혀 다른 스트레스가 시작된다. 흥행 문제는 아니다. 설사 천만 관객을 동원한다 해도 괴로운 건 마찬가지일 거다. 어느 쪽이든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눈돌리지 않고 응시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번 영화를 마치고 앞으로 세편 정도는 오락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나마 조금 벌어놓은 걸 이번 영화에 다 투자해버렸기도 했고. (웃음)

-왜 로마서 8장37절인가.

=로마서 6장은 죄를 다루는 장이다. 단순히 죄만 다룬다면 사회 고발성 영화에서 끝나버릴 것 같았다. 신학 작가 톰 라이트의 책을 보다가 8장37절로 하기로 결정했다. 신앙적으로 죄의 단계를 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속적 패배를 통해 이미 획득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 기섭(이현호)이 패배하는 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한 시련이자 과정이다. 완전히 나락까지 떨어진 후에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의 허상과 위선의 껍질을 깨닫고 진정한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새삼스럽지만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구절을 강조하고 싶었다.

<로마서 8:37>

-원로 목사와 현재 목사인 요섭(서동갑)의 대립을 통해 정치화된 한국 교회 내부의 비리와 성장제일주의를 지향하는 교회의 모순을 고발한다.

=특정 교회나 특정인을 모델로 한 건 아니다. 여러 교회를 취재했고 철저히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서술했다. 교회 내부의 알력을 왜 정치적으로 그렸는지를 묻는다면 그게 사실이니까. 영화에서 묘사되는 표현은 오히려 절제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거다. 단순히 악인, 이 영화에서는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의 죄를 교언으로 덮으려는 목사 요섭의 죄를 고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선악을 가르고 죄의 표면만 보고 쉽게 단죄를 말하는 것이 한국 사회가 담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척박해지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원죄를 외면하고 가짜 가치에 집착하는 것. 그 부분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사익의 추구를 공공의 선인 양 포장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 요섭 목사가 스스로의 죄를 교회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덮는 순간, 말하자면 위선의 가면을 쓰는 순간부터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다. 심지어 대의,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개개인의 희생까지 요구한다는 거다. 그건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니라 사회체제의 문제다.

-전반부는 교회 내부의 권력 투쟁처럼 풀다가 중반 이후 전도사 기섭의 신앙적인 고백과 성찰로 전환된다. 때문에 정작 죄를 저지른 요섭 목사가 아니라 기섭이 대신 회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분이라면 응당 해야 할 질문이다. 흔히 말하는 해피엔딩, 이야기로서의 권선징악은 많은 것을 덮는다. 당장 마음은 편해지지만 본질적인 부분을 가리는 것이다. 가령 악인이라고 쉽게 지정할 수 있는 요섭을 단죄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보다 더 나쁜 놈을 지정해버림으로써 자신은 늘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잔혹해질 수 있다. 자신의 잣대로 선악을 가르고 이를 시행하다보면 누구나 독재자, 살육자가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렇다고 기본적으로 아예 선악을 구분하지 말고 가치 판단을 멈추라는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이 완전하게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 그걸 스스로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 이 차이가 매우 중요하다. <로마서 8:37>이 전하고자 하는 지점도 원죄의 자각,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결국 기섭이 기독교인으로서 자각하고 죄를 회개하는 이야기로 봐도 좋을까.

=역설적으로 우리는 세속적으로 패배했을 때 비로소 그 승리를 인지할 수 있다. 가령 기섭은 시작과 끝에서 각각 기도를 한다. 하지만 그 태도와 뉘앙스는 전혀 다른 행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차이가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생각, 축원, 바람이 있는 기도를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완전히 망가져서 더이상 ‘내’가 없을 때 비로소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하셨고 사랑을 주셨다. 하지만 널리 퍼진 사랑을 우리가 받지 못한다. 영화 속 기섭은 변호사도 만나고 홍보 전문가도 만나면서 세상적인 승리를 기원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민(이하진) 말고 다른 피해자가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했지만 눈앞의 부조리를 보지 못하는 거다. 이건 덜 나쁜 놈인 기섭이 훨씬 나쁜 놈인 요섭 목사를 이기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단죄 이전에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회가 어떤 모양인지부터 인지해야 한다. 그건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이건 다 마찬가지다.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이 좀더 낫다는 위안을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 서로 다른 욕망을 판단하고 위선을 자각하는 것. 이 영화가 종교영화 이상의 의미가 있다면 그 지점일 것이다.

-원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등 기독교리에 충실한 종교영화라고 하지만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 할거리를 안긴다.

=순진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영화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프로파간다를 하겠다는 게 아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담론과 화두를 이끌어내자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고, 사회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며, 그 안에서 개개인이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8:37>이 사회 고발성 영화가 아니라는 걸 누차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교회 내부의 비리나 권력 다툼들은 물론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는 표면일 따름이다. 진정 바라봐야 하는 건 그런 부조리들을 직시하고 이를 통해 결국 우리 자신이 누군지 들여다보자는 거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는 우선 각자의 비겁함에 대해 말해야 한다. 거대 담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장 눈앞의 부조리에 대해 침묵하는 이들이 다수다. 그렇다고 비겁함 자체를 비난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상황에 닥치면 비겁해질 수 있다. 비겁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그런 위치에 가지 않았을 따름이다. 진정 나쁜 건 위선이다. “네 편이야, 내 편이야?”의 진영 논리로 가르고, 표면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본질이 흐려진다. 이 영화가 익숙한 드라마적 관습을 비껴나가는 이유다.

-제작부터 연출, 신인배우 발굴, 심지어 배급까지 한국영화에서 그야말로 온전히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거의 유일한 모델을 구축했다.

=그래서 영화진흥위원회의 연구원들이 자주 찾아온다. (웃음) 애초에 의도한 길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후회는 없다. 나는 대농장에서 아르바이트도 하지만 집에 가면 작지만 내 텃밭이 있는 거니까. (웃음) 그걸 가꾸려고 20, 30대에 매일 밭에 나가서 돌을 고르고 땅을 갈며 고생한 셈인데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지속적인 수확물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있다. (웃음) 감독마다 잘하는 분야, 좋아하는 분야가 각기 다르다. 기획자로서의 감각이 탁월한 분도 있고, 현장에서 빛을 발하는 타입도 있고, 편집을 좋아하는 분도 있다. 내 경우에 근본은 글을 쓰는 거다. 시나리오를 쓸 때가 제일 즐겁다. 그걸 계속하기 위해서 연출, 제작, 기타 등등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온 셈이다. 가능한 한 신인배우와 함께 작업하려고 하는 건 감독으로서 작게나마 사회적 책무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처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저질러왔다. 다음 목표는 30억원짜리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거다. 그걸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부지런히 돈을 모아야 한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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