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TV시리즈⑧] 제인 캠피온 <톱 오브 더 레이크> - 파라다이스에 여성들이 산다
장영엽 2017-11-13

<톱 오브 더 레이크> Top of the Lake

제작·감독·각본 제인 캠피온 / 시즌1 출연 엘리자베스 모스, 데이비드 웬햄, 피터 뮬란, 홀리 헌터 / 시즌2 출연 그웬돌린 크리스티, 앨리스 잉글러트, 니콜 키드먼 / 미국 내 방영 <선댄스 채널>, 국내 방영 넷플릭스(시즌1)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감독’이라는 수식어도 그녀의 차기작을 담보해주지는 못했다. 1993년 <피아노>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성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뉴질랜드 감독 제인 캠피온 이야기다. 그녀의 마지막 장편영화 연출작은 2009년의 <브라이트 스타>였다. 그마저도 6년 만의 신작이었는데, 2003년 멕 라이언과 함께 작업한 에로틱 스릴러 <인 더 컷>이 평단의 혹평을 받으며 제인 캠피온은 오랫동안 메가폰을 내려놓아야 했다. “가장 힘든건 내 영화의 거의 모든 리뷰를 남자들이 썼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의 관점을 싫어했고 여성들이 남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방식을 싫어했다. 나는 여전히 <인 더 컷>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시선을 담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영화를 시작한 제인 캠피온은, 여성적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 영화계와 오랫동안 투쟁해왔고 지난 2013년 새로운 유토피아로 TV를 선택했다. 제인 캠피온이 총괄프로듀서와 크리에이터, 연출을 겸한 드라마 <톱 오브 더 레이크>는 창작자로서 그녀가 꿈꿨던 비전이 어떤 것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수작이다.

<톱 오브 더 레이크>의 첫 번째 시즌은 뉴질랜드의 어느 호숫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 사는 12살 소녀 투이의 임신 소식이 마을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각자의 집안 사정을 두루 알고 지내는, 좁고 깊은 관계로 이루어진 마을이기에 충격은 더하다. 소녀를 강간한 인면수심의 남자는 누구인가. 개인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시드니에 머물러왔던 경찰 로빈(엘리자베스 모스)이 투이의 사건을 맡게 되고, 본격적으로 수사를 진행하던 도중 투이가 실종된다.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투이의 아버지와 오빠들, 소녀와 비밀스럽게 문자를 주고받던 이성 친구, 소아성애자 전과를 가지고 있는 동네 주민 등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아동 성범죄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취하고 있지만, <톱 오브 더 레이크>는 누가 어떻게 소녀를 범했는지보다 사건을 수사하는 여자 경찰과 소녀를 둘러싼 폭력적인 환경을 보여주는 데 더 관심이 많다. 로빈의 주변에는 “당신은 형사예요, 페미니스트예요, 레즈비언이에요?”라는 식의 여성 혐오적인 발언을 일삼는 마을 사람들이 가득하다. 사건을 수사할수록 로빈은 투이가 사회적 약자로서, 어린 여성으로서 마주했을 두렵고 공포스러운 순간을 체감하게 되고, 투이의 모습으로부터 잊고 지냈던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이라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여성들이 서로 연대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톱 오브 더 레이크> 시즌1의 가장 중요한 테마이기도 하다. 제인 캠피온은 호숫가 마을 외곽 ‘파라다이스’라는 지역에 그들만의 힐링 캠프를 꾸린 여성 캐릭터들의 사연을 통해 이러한 테마를 더욱 견고히 한다. 폭력적인 침팬지를 안락사시킨 여성, 바람난 남편에게 상처받은 여성과 그녀의 딸 등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배경과 사연을 지닌 파라다이스의 여성들은 과거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여성, GJ(홀리 헌터)를 중심으로 모여 산다. 가부장적 사회의 기준으로 더이상 “팔리지 않는” 존재로 평가받는 이 여성들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많은 것들을 알고 있으며, 사건 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더불어 <톱 오브 더 레이크>의 또 다른 매력은 뉴질랜드의 원초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호수와 광활한 숲을 배경으로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는 인물을 제인 캠피온은 종종 익스트림 롱숏으로 조명하는데,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의 스케일에 비견할 만큼 인상적인 순간들을 선사한다.

시즌1의 호평에 힘입어 제인 캠피온은 <톱 오브 더 레이크> 시즌2인 <톱 오브 더 레이크: 차이나걸>을 올해 7월 처음으로 공개했다(국내 방영은 미정이다). 작품의 배경을 뉴질랜드에서 호주 시드니로 옮긴 이번 시즌 역시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여성들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로빈 형사는 충격적인 결말로 마무리된 아동 성범죄 사건을 뒤로하고 시드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그때 시드니의 해변에서 임신한 매춘부의 시신이 담긴 슈트케이스가 발견된다. 매춘부 살인사건의 범인을 좇는 형사로서의 로빈과 어떤 사연으로 입양된 그녀의 딸 메리(앨리스 잉글러트), 메리를 입양한 페미니스트 줄리아(니콜 키드먼)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펼쳐진다. 낳은 엄마와 기른 엄마.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사춘기 딸과 그녀의 위험한 남자친구. <톱 오브 더 레이크: 차이나걸>의 등장인물들은 ‘막장’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할 법한 관계를 맺고 있다. “스캔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 제인 캠피온은 이 드라마의 ‘막장’ 요소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손쉬운 미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목표는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의 여정”으로 시청자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자극적인 사건들을 좇다가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 <톱 오브 더 레이크>는 그 삶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향해 느리게 전진하는 드라마다.

제인 캠피온의 여자들

<톱 오브 더 레이크>에는 제인 캠피온의 영화를 눈여겨봤던 관객이라면 반가워할만한 얼굴들이 많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인물은 <피아노>의 주연배우 홀리 헌터다. 그녀는 시즌1에서 상처받은 여성들에게 마음 둘 곳, 쉴 곳을 제공하는 힐링 캠프의 리더, GJ로 등장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중성적인 옷차림으로 ‘파라다이스’를 찾은 마을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그녀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과묵하게 책을 읽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다. 하지만 무심한듯 정곡을 찌르는 GJ의 한마디는 그녀가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제인 캠피온은 시즌2에서 그녀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시즌3가 제작된다면 가장 복귀시키고 싶은 인물로 GJ를 꼽았다. 니콜 키드먼의 등장도 반갑다. 시즌2에서 메이크업을 반대하는 페미니스트 줄리아로 등장한 그녀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여인의 초상>(1996)에서 제인 캠피온과 함께 작업한 바 있다. 그녀는 제인 캠피온과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게 된 소감에 대해 “집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한편 니콜 키드먼이 연기하는 줄리아가 입양한 딸 메리로 제인 캠피온의 실제 딸이자 배우, 앨리스 잉글러트가 출연한다는 점이 재밌다. 이 작품에서 메리는 반항적이고 날카로우며 위험한 남자를 만나고 있는데, 제인 캠피온은 “내 딸을 이렇게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게 심리적으로 편하지가 않았다. 비록 연기라 하더라도 말이다”라고 말하며 딸과의 협업이 쉽지만은 않았음을 고백했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