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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이 시작이다
윤가은(영화감독) 2017-11-09

한달 전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복받치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엉엉 소리내 운 경험이 있다. 그렇게 아프고 기쁜 감정을 오롯이 분출해본 것도, 그토록 순수하고 건강하게 기분이 고양된 것도 참 오랜만이라 극장을 나오면서는 ‘그래, 좋은 영화를 만나는 기쁨이 이런거였지’ 하는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느꼈다. 모든 건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나문희)과 진주댁(염혜란)이 만들어낸 눈물과 위로의 명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영화 속 옥분은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아픈 과거를 용기내 세상에 알리지만 이후 시장 사람들이 자신을 어려워하고 피하는 것 같아 괴롭기만 하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진주댁마저 옥분을 외면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진주댁에게 왜 자꾸 자신을 피하냐고 섭섭함을 토로한다. 그러자 진주댁은 세상 누구보다 괴롭고 아픈 얼굴로 간신히 입을 뗀다. 서운해서 그랬다고, 함께해온 시간 동안 귀띔 한번 안 해준 게 괘씸해서 그랬다고, 그 오랜 세월 옥분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 거냐고, 진주댁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옥분을 꼭 끌어안고 옥분은 그 진심어린 위로 속에서 다시 어린 소녀로 돌아간 듯 울음을 터뜨린다.

진주댁은 ‘서운해서’라고 했지만 사실 그녀의 표정은 ‘미안하고 고마워서’에 가까웠다. 그렇게 무섭고 아픈 비밀을 홀로 간직하고 살아 가게 만들어서 너무나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지금껏 잘 버텨내고 마침내 용감하게 진실을 알려줘서 정말로 고맙다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진심어린 미안함과 고마움에 그칠 줄 모르고 흐르던 진주댁의 눈물이, 그 따스한 포옹이, 어쩌면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역사상 가장 추악한 성범죄자 중 한명으로 기억될 ‘하비 웨인스타인 사건’을 지켜보며 그의 악랄하고 파렴치한 범죄 행각에 집중하기보다는 두려움을 이기고 끝끝내 진실을 알린 수많은 여성들의 용기에 더 마음이 갔다. 그리고 그들을 열렬히 응원하며 힘을 실어준 뭉클한 고백과 발언들에 더욱 깊이 감동받았다. 아마도 다시 옥분과 진주댁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인생에 일어난 가장 끔찍한 사건이었을, 절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것들에 대해 앞장서서 증언한 레아 세이두, 아시아 아르젠토, 애슐리 저드, 카라 델러빈, 로잔나 아퀘트, 기네스 팰트로, 안젤리나 졸리, 로즈 맥고완, 루피타 니옹고 등 50여명이 넘는 여배우와 모델과 배우 지망생들에게서 누구보다 용감하고 강한 옥분을 보았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지만 목소리 높여 진실을 알려주어 진심으로 고맙다고 힘을 보태는 관계자들은 모두가 또 다른 의미에서 진주댁이었다.

그녀들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더이상 추잡한 권력에 희생당한 불쌍한 피해자는 없었다. 악한 범죄에 당당히 맞서며 자신을 지켜낸 생존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각자의 위치에서 용기내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을 수많은 이들에게 힘찬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언제까지나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지지하고 잊지 않을 것을 온 마음으로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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