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길을 걷다 갑자기 떠올라 디스트로이어의 2015년 앨범 《Poison Seasons》를 플레이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과연, 밴드 이름과는 상반된 섬세한 결의 사운드가 울려퍼지자마자 나는 이 음반이 걸작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디스트로이어는 캐나다에서 결성된 록 밴드. 그들에 관한 또 다른 글을 이 지면을 통해 쓴 적 있지만, 이렇게 다시금 호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새 앨범 《ken》(2017)이 막 발매되었는데, 이 또한 환상적인 음악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ken》의 전체적인 기조는 《Poison Seasons》와는 조금 다르다. 《Poison Seasons》가 서정적이면서도 시네마틱했다면, 《ken》은 몽롱하고, 꿈결 같은 사운드와 록, 그리고 신스 팝 사이를 오고 간다. 광활하고, 다채롭다. 요즘 날씨에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고 받아들여도 좋겠다. 한곡만 추천해야 한다면 <Tinselton Swimming in Blood>를 선택할 듯싶다. 이건 뭐랄까, 마치 조이 디비전이 요즘 시대에 되살아났으면 했을 만한 음악처럼 다가온다. 이렇게, 디스트로이어는 전설을 소환하면서도 자기 개성을 놓치지 않는다. 과거, 음악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을 수놓은 화려한 이름들이 창공에 펼쳐지지만, 거기에 디스트로이어의 이름 역시 ‘함께’, 그것도 ‘더욱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앨범이다. 훌륭한 메타포란 감춰진 가능성의 물줄기를 드러내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디스트로이어는 그 자체로 훌륭한 메타포인 밴드다. 하긴, 좋은 뮤지션/밴드들이 대개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