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거의 가진 것 없이 자랐기 때문에-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것뿐이었다.” 이 사람이 루시 바턴이다. 루시 바턴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해,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나 뉴욕에서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살며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처럼 보이지 않게 해주는 의사의 도움을 받는 나이가 되어, 어떤 시절을 떠올린다. 맹장수술을 받은 그녀는 남편의 부탁을 받고 병간호를 하러 온 어머니와 며칠을 병원의 일인실에서 보냈다. 대화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우리 가족’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하는 많은 가족처럼. 아니, 최악의 가족은 아니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실제로 많은 어머니들은 루시 바턴의 어머니처럼 다른 사람들의 결혼생활(대체로 좋게 끝나지 않은 결혼생활들)에 대해 여상한 말투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녀 자신의 결혼생활을 말하는 또 하나의 방법.
루시는 어머니의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성장기의 순간들을, 떠오르는 대로 두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기억도 가물거리는 남에 대해 말하며 “사람들이란”이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우리 자신이 ‘그런’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애써 언급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들이 불쑥 떠올랐다 사라지고 그 의미를, 상처의 정체를 루시는 굳이 파고들지 않는다. 나이를 먹으면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부질없음을 배우게 된다. 그냥 그렇게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고 시간은 흘러간다.
루시의 딸 베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엄마가 소설을 쓸 때는 그 내용을 다시 쓸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와 이십년을 살았다면, 그리고 그것도 소설이라면, 그 소설은 다른 사람과 절대 다시 쓸 수 없어요!” 루시와 남편 윌리엄의 끝난 결혼생활에 대한 말이지만, 루시가 나고 자란 가족 역시 그러하다. 그들과만 쓸 수 있었던 소설을, 우리는 쓰며 살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예고 없이 그냥 퇴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작별을 고한다. 만났으니 헤어지고, 결혼했으니 이혼을 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게 다다.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가득 차는 순간들이-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 앎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 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루시가 이런 말을 할 때 느끼는 외로움 혹은 공포의 감정을 나 역시 느낀다고 한다면,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당장 뛰어들어갈 옷가게가 없다고 하면 어떨까. 이런 사람을 위해 소설은 존재한다. 지금 여기에 나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서. 루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렇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모든 사건은 대체로 불충분하게 설명되고, 다 이해한다고 말하기에 루시는 나와 너무도 다른 삶을 산, 나와 다른 성격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 성격이 아주 모호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질량감만큼은 선명해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감정- 과거의 사람과 사건을 떠올릴 때 흔히 나를 괴롭게 만드는- 을 글로 표현하는 루시의 재능만큼은 대단해서, 자주 당황하게 된다. 내가 한번도 겪은 적 없는 일을 서술한 대목을 읽는데 갑자기 머릿속의 어떤 문이 열리고, 거기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압도당한다. 이것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장기다, 특히 어머니와 딸 사이의 말해지지 않는 감정에 대해서 쓸 때.
이랬어, 저랬어, 하고 말해놓고, 그날 자려고 누웠을 때 전에 떠올린 적 없었던 장면이 생각나 망연자실한 기분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그게 아니었을까. 내가 물은 적 없었던 아버지의 감정과 어머니의 감정에 대해 영영 물을 수 없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영영 질문할 수 없는 장면의 주인공들이 점점 늘어난다. 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기억으로 남게 되리라. 행복한 기억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