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다, to worry’라는 동사는 빅토리아 시대 이전에도 영어에 존재했지만 그 개념은 오늘날과 달랐다고 한다. 원래 사람이나 동물을 목조른다는 뜻으로 쓰인 이 단어는 나중에 가서 괴롭힌다는 뜻이 되었다. “이것은 물리적 괴롭힘의 행위를, 때로는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가리켰다.”
프랜시스 오고먼은 영국 리즈대학 영문학 교수인데, 17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영문학에 대해 써온 작가다. 오고먼의 <걱정에 대하여>는 제목 그대로 ‘걱정’이라는 개념의 발전상을 영문학을 중심으로 탐구한다. 이 책에 관심이 간 이유라면 역시, 나도 걱정이라는 것에 쉽게 사로잡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불안해진다. 어떻게 돌아누워도 잠들 수 없어진다. 그리고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처음 든 생각은 고작 ‘이번달 월급이 들어오면 무슨 돈부터 내야 하지? 월세 내고 나서 카드값을 내고 나면 돈이 모자라는데’ 정도였다. 취직하고 매달 하는 고민이니까 별 새로울 것도 없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 되면 인쇄매체의 (어두운) 미래와, 나 자신의 (급격한) 노화, 독거인의 (새삼스러운) 건강 걱정 같은 것들이 줄지어 나를 향해 행군을 시작한다. 그 마지막은 거의 예외없이 어느 날 일도 없고 돈도 없고 가족도 없이 쓸쓸하게 쇼윈도 아래 창문에서 꽁꽁 언 손을 입으로 호호 불어 녹이며 “성냥 사세요…”. 이게 아니고.
‘걱정’의 흥미로운 점은 이성으로 억누르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말만큼 걱정스러운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대기업 간부를 만나도, 부동산을 100억원 넘게 보유한 사람을 만나도, 톱스타를 만나도, 연금을 두둑하게 받는 퇴직공무원을 만나도 다 걱정을 하고 있다. 내가 뭐라고 걱정을 하지 않겠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니까 걱정을 하는 거라고!
KEEP CALM and CARRY ON. 진정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자.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여튼 나는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걱정은 일종의 잘못된 정신적 위험 판정과도 관련되어 있다. 걱정은 가장 불가능해 보이는 결과를 졸지에 가장 강제적이고 가시적이고 중요한 결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걱정은 우선순위를 혼동시키고, 가능해 보이는 것에 대한 판단 능력을 저해한다.” 와중에 걱정꾼들은, 아무리 적절한 답변으로 걱정을 달래려는 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 답변을 충분히 오래 신뢰하지 않는다. 즉, 다시 걱정으로 빠르게 되돌아간다. 어쨌거나 이 ‘걱정’이라는 영단어가 빅토리아 시대 말기 소설에서 각광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신의 내면에 특히 관심을 보인 소설들에. 책 말미에는 ‘예술의 걱정 진정 효과’라는 대목이 있는데 약간 웃게 된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예술이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지구상의 인간 군상 중에서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불안하고 걱정 많고 격정적인 이들은 또 없다. 그 맛에 창작하고, 즐기는 것이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