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떠나기 얼마 전 칼럼 연재 요청을 받았다. 망설여졌다. 몸이 한국에서 멀어지니 감각과 생각이 느슨해지면 어쩌지 하는 염려가 들었다. 하지만 아주 오래 떠나는 것도 아니고 해외 체류가 다른 시선으로 한국을 보게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칼럼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낯선 도시의 카페에 앉아 뭘 쓸까 궁리를 하니 난감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예를 들어보자. 이곳에서 나이가 지긋한 이란 사회학자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레 북핵 문제를 거론하게 됐다. 대화 도중 그분의 아들이 나타났다. 갑자기 축구 이야기가 시작됐다. 마침 그날 한국과 이란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결정된 것이다.
그날의 대화는 한없이 이어져서 종교와 시와 음악에까지 뻗어나갔다. 어쩌면 이날의 에피소드로 칼럼을 써도 될 것 같다. 문제는 원고 매수다. 8매다. 적당히 자르면 되지 않냐고? 바로 그게 문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어느 날 낯선 타지에서 이란 부자(父子)와 우연히 함께 피운 특별한 이야기꽃의 꽃잎을 매정하게 뚝뚝 떼지 못하는 내 성정이 문제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한국에서는 그새 온갖 사안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중 어떤 문제는 내가 종사하는 영역, 즉 문학계와 학계와 관련된 것들이다. 평소에 고민도 했고 언젠가는 용기를 내서 글을 써야지 싶은 문제들이지만 역시 쉽지 않다.
칼럼이라는 공적 글쓰기는 진리 주장을 담는다. 그 진리 주장의 한 다리는 광장에 빼곡한 눈과 귀를 향해 있고 다른 다리는 타당성이라는 검증 절차에 묶여 있다. 공적 글쓰기란 이 두 다리가 뒤뚱뒤뚱 이어가는 행보다. 그 행보 끝에 간신히 다다른 결론도 지극히 잠정적이다. 놀랍게도 어떤 칼럼은 제한된 지면 안에서 작은 성취를 이루어낸다. 나는 명문과 미문이 가득한 칼럼, 주장이 무 자르듯 확고한 칼럼, “좋아요”를 단번에 누르게 만드는 칼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칼럼에는 때때로 의심의 눈길을 던진다. 독자들에게 “유레카!”를 선사해주는 칼럼은 진리 주장의 얄팍한 껍데기 아래 자아 주장이라는 거대한 욕망을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자아 주장의 욕망을 어찌 무시할 수 있으랴. 글쟁이로서 고백건대 광장에서 주목받고 싶고 논리의 재판정에서 승리하고 싶고 자신의 유레카를 자랑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란 힘들다. 결국 글쓰기란 진리 주장과 자아 주장의 지난한 투쟁이며, 이 투쟁의 결과로 잘난 척하는 헛소리도 나오고 오래 곱씹을 만한 맛깔난 삶의 화두도 나온다.
첫 칼럼이기에 고민이 많았다. 원래는 다소 엉뚱하지만 젓가락질에 대해 쓰고 싶었다. 중국 식당에서 밥을 먹다 젓가락질에 서툰 서양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시아의 몇몇 나라들은 모든 국민이 하나의 기예에 통달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젓가락질이다. 그런 경우가 또 있나? 젓가락질은 어디서 기원했는가? 그것은 인류 역사와 문화와 어떤 상관성을 갖는가?”
나는 “젓가락 유레카”를 진리 주장의 시험대에 올리고 싶었다. 아아, 그러나 8매여, 진리도 자아도 가차 없이 뚝 부러뜨리는 8매여, 참으로 매정하구나. 다음엔 내게 좀더 관용을 베풀어주기를. 아니, 실은 내가 그대에게 관용을 베푸는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