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스>의 배경인 ‘발트하우스 플림스 마운틴 앤드 스파’.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이 도시 기능을 구분하는 공식적인 명칭이라면, 부자동네와 달동네 같은 이름은 구성원에 대한 비공식적인 구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 중에는 노인동네도 있다. 기대수명의 연장과 은퇴라는 제도적 규정은 노인이라는 생물학적 기간을 도시계획의 대상으로 변화시킨다. 젊은이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노인인 농어촌 지역이 아닌 고령화사회가 만들어낸 ‘노인들을 위한 마을’의 예로는 미국 남부 애리조나주에 위치한 선시티(Sun City)가 있다. 노인이 되기 전에는 알 수 없겠지만 신진대사 기능이 약화되는 고령자에게 추위는 견디기 힘든 문제다. 선벨트라 불리는 미국 남부지역은 따뜻한 날씨 덕분에 나이 든 은퇴자들을 위한 이상적인 주거환경을 제공한다.
1960년 한 개발회사에 의해서 애리조나주에 건설된 선시티는, 2016년 기준 평균 나이가 73살인 마을이다. 인구 3만7천명의 이 도시는 교회, 쇼핑센터, 레크리에이션센터, 그리고 8개의 골프코스가 단독주택들과 함께 마을을 이루고 있는, 노인들을 위한, 관리되는 도시다. 전체 인구 중 약 0.14%만이 18살 이하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어쩌면 우리의 미래 모습일 수도 있는, 생산력이 사라진 도시가 만들어진다. 이런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고 좀더 일반적인 현상은, 노인인구 비율이 더 높은 지역이 있거나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은 유지하고 일시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계절을 보내는 은퇴한 노인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현상이 존재한다는 뜻은 이들을 위한 다양한 건축 유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지금이 중요하다
자신의 집을 떠나서, 오랜 기간 다른 장소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을 위해 생겨난 건축 유형 중 하나는 ‘리조트’다. 리조트가 호텔과 다른 점은 리조트 안에 자고, 먹고, 놀 수 있는 모든 시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거다. 내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은 도시 안에 작은 닫힌 구조의 사회를 만들어낸다.
<유스>(2015)의 배경이 되는 호텔은, 스위스의 ‘발트하우스 플림스 마운틴 앤드 스파’다. 18세기부터 알프스 지역은, 고산지대의 공기가 폐질환에 좋다는 이유로 유럽의 여름 휴양지로 알려져왔다. 영화에서도 잘 드러나는 것처럼 호텔의 성격은 건강관리센터가 더해진 고급 스파 리조트다. 1877년에 처음 지어진 본관 건물과 이후 다양한 시대의 증축 건물들로 이루어진, 넓은 단지를 이루는 ‘호텔 파크’다. 이 호텔 건물들에서 나타나는 다른 건축 스타일은 시대의 변화와 일치한다. 최근에 지어진 유리 박스 형태의 수영장 건물과 컬링센터는 사계절 관광지로의 호텔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유럽의 도시가 우리 도시와 다른 점은 오래된 건물을 보존하고 새 건물을 증축하는 프로젝트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증축하는 프로젝트는 오래된 건물과 새 건물 사이의 관계를 잘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속 호텔은 19세기 석조 건물에 현대적인 유리 건물을 더해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고, 지하통로를 통해 기능적으로도 연결된다. 이를 통해서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공존하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유스>는 영화를 보기 전에 포스터 사진을 통해서 흥미를 갖게된 영화다. 포스터는 야외 사우나에 하반신을 담그고 있는 마이클 케인과 하비 카이텔이, 물속으로 들어오는 전라의 젊은 여성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풍만한 젊은 여성의 뒷모습과 대비되는 나이 든 두 배우의 모습을 통해 상투적이고 단순하지만 명확하게 젊음과 늙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스>에서 하비 카이텔은 영화감독이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 호텔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그에게 사회적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과 일치한다.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지휘해 달라는 영국 여왕의 부탁도, 자서전을 만들자는 출판사의 제안도 거절하고 스스로 사회적 활동의 문을 잠가버린 마이클 케인은 친구의 죽음 후에 다시 무대 위에 오른다.
영화에서 하비 카이텔은 전망대 망원경 앞에서 젊은 시나리오작가에게 말한다. 망원경을 통해서 가까이 보이는 산의 모습은 젊은이가 미래를 보는 것이고, 망원경을 거꾸로 돌려서 더 멀리 보이는 풍경은 노인이 세상을 보는 것, 과거를 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노인도 망원경으로 보는 풍경처럼 미래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노인은 과거에 얽매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는 나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졌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노인에게도 미래는 똑같이 중요하다. 아니,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은 ‘현재’일 뿐이다.
건물의 소멸 혹은 연장
건물도 사람과 같이 자신의 수명을 갖고 있다. 그 수명은 항상 물리적인 내구성에만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건물의 죽음은 도시에서 자신의 가치와 연관되어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건물은 자본의 가치에 의해 자신의 삶이 결정되곤 한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자신의 물리적 수명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건물에 자신의 자리를 내준다. 반면에 중요성을 인정받은 건물들은 외관은 유지한 채 내부를 고치거나, 일부를 증축하거나, 아니면 에펠탑처럼 각 부품을 새로운 부품으로 끊임없이 교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연장해나간다.
건물의 소멸 혹은 연장에 관한 것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물이 있다. 1990년 독일 통일 후 베를린의 동독의사당 건물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건물에서 발견된 석면을 제거하기 위한 몇년의 공사기간을 거친 후, 자신의 기능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사회에서 사회주의국가의 의사당은 철거가 예상되어 있었지만 통일 후 불안정한 경제상황은 건물을 오랫동안 방치하게 했다. 큰 내부 공간을 갖고 있는 의사당 건물의 특성과 역사로서의 건물 성격에 관심을 가진 시민단체들은 철거 대신 건물의 보존과 사용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콘서트, 댄스경연대회, 바자회 같은 것을 통해 건물에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기회를 주었다.
죽음을 앞둔 건물을 재활용하는 이러한 접근은 새로운 제안을 이끌어냈다. 건물이 소멸되는 기간과 과정까지도 건물의 삶에 포함시키자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콘서트와 같은 대규모 공연을 위해서 내부 벽들을 더 철거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구조의 역할을 하는 기둥과 보, 슬래브만 남겨두고 외부 벽을 철거해서 파빌리언 같은 상태로 남겨놓는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남아 있는 구조물을 철거해서 모두 지하실에 채워넣고 뚜껑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소멸에 관한 이 시적인 아이디어 대신 동독의사당 건물은 2008년에 철거되었다. 그리고 건물이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것은 3500t가량의 철골 부재다. 이 철골 구조물은 두바이로 옮겨져서 부르즈 할리파 고층 건물 공사에 사용되었다. 사회주의 시대의 동독의사당 건물은 중동 국가로 옮겨져 초고층 건물의 일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