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동취재단. 국가정보원 ‘엔터팀’이 영화의 제작·투자·배급 전 과정에 긴밀하게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영구 집권 플랜’.
지난 보수정권 9년 동안 국가정보원 활동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 댓글 사건’,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 사건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다. 퍼즐처럼 엮인 큰 그림의 일부다.
원세훈의 인터넷 여론 장악 큰 그림
대부분의 ‘플랜’은 위기에서 시작된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광우병 촛불시위)가 첫 번째 위기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까지 추락했다. 이듬해인 2009년 초 원세훈으로 국정원장이 바뀌었다. 서울시 경영기획실장, 서울시 행정1부시장, 행정안전부 장관. 그의 주요 이력이다. 주로 서울시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국정원장에 부임하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원 전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깔끔한 일 처리와 공무원 장악 능력을 보여 큰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의 구원투수로 대통령의 복심이 등판한 것이다.
원 전 원장 취임 뒤 △국내 정치 개입 △보수단체 육성 △정부 비판 단체 공격 등 옛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시절의 악습이 되살아났다. 국정원이 새로 주목한 것은 인터넷을 통한 여론 장악 공작이다. 이 공작의 성격은 ‘정화’와 ‘파괴’로 요약할 수 있다.
원 전 원장은 2011년 10월 21일 국정원 전 부서장 회의에서 “지금 인터넷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터넷 자체가 종북좌파 세력들이 다 점령하다시피 보이는데 여기에 대한 대책을 우리가 제대로 안 세우고 있었다. 전 직원이 인터넷 자체를 청소한다는 그런 자세로 그런(좌파) 세력들을 끌어내야 된다”고 말한다. 오염된 인터넷 공간을 ‘정화’해야 한다는 취지다.
1단계 정화가 불가능할 때는 ‘파괴’ 공작이 동원된다. 2015년 2월 9일 원 전 원장의 항소심 판결문에는 “(국정원 직원들은 ‘오늘의유머’ 커뮤니티에 올라온) 유머, 연예, 요리 게시글에 대하여 로그인이 필요하지 않은 추천 클릭을 많이 하여 베스트 게시판에 올리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하면, 자신들이 판단했을 때 베스트 게시판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될 게시글 혹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게시글을 베스트 게시판 상단에서 밀어낼 수 있다”는 부분이 나온다. 정부에 비판적인 주장이 인터넷에 올라오고 이를 통해 거대한 여론이 형성되는 연결고리를 단절하는 작업을 벌인 것이다. 게시판 이용자는 이런 상황을 게시판에 ‘먹칠했다’고 표현한다.
실제 국정원은 2009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통해 사회 여론을 주도한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집중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의 공작은 정권을 찬양하고 비판 세력을 비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정권에 위협이 되는 사건이 터지면 연예계 이슈 등을 부각하고 게시판에 ‘먹칠’해 비판 여론이 형성되는 흐름을 끊었다. 국정원의 개입이 이어지면서 다음 아고라는 공론장 기능을 점점 잃게 됐다.
이런 공작은 단순히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그림이 있었다. 원 전 원장은 2010년 7월 19일 국정원 전 부서장 회의에서 “우리 전 직원이 단기적 문제보다도 큰 흐름으로 가야 한다. 우리 국정원이 할 일은 대한민국의 헌법적인 가치를 끌고 가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심리전단하고 같이 협조를 해서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보수가 영구 집권을 할 수 있도록 국정원이 ‘주체적’으로 나서 다양한 공작을 펼쳐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변호인>의 제작사나 투자사에는 지원이 중단됐다. 강력한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진위 전 고위 관계자
‘엔터팀’, 청와대 영화계 개입의 수족이었나
이와 함께 이명박 정권은 인터넷 여론 공작과 언론 장악을 시도했다. 광우병의 문제점을 보도한 MBC <PD수첩>은 검찰 수사를 받았고, 조·중·동 등 보수신문이 주축이 된 ‘종합편성채널’ 승인이 이뤄졌다.
박근혜 정권 들어 국정원이 눈을 돌린 것은 영화 등 콘텐츠 산업이었다. 공론장에서 유통되는 콘텐츠 자체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이뤄진 것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는 문화계의 진보 성향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이를 보수화하려는 생각이 만연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권 초기부터 보수단체들이 계속 우파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이후 이른바 보수적 가치를 담은 영화들의 펀딩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처럼 변화된 영화계 기류에 영화진흥위원회의 한 전직 고위 관계자는 “2013년까지 함량 미달의 우파 영화들에 투자 지원을 거부할 수 있었다. 우리끼리는 우파 콘텐츠를 ‘마가 낀 영화들’이라고 불렀다. 그들도 영진위 외에 투자 경로를 몰랐다. 하지만 <변호인> 이후 우파 영화들이 방법을 달리했다. 모태펀드를 통해 우파 영화의 지원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반면 <변호인>의 제작사나 투자사에는 지원이 중단됐다. 강력한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영화산업의 생명력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산업화의 가치를 부각하는 <국제시장>이나 북한과의 해상 교전 과정에서 순국한 군인들을 다룬 <연평해전> 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도 다양성 차원에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정치와 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다.
고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수첩을 보면 2014년 12월 28일치에 “<국제시장> 제작 과정 투자자 구득난, 문제 있어, 장악, 관장 기관이 있어야”라고 적혀 있다. 청와대가 영화를 정치적으로 바라보고 정권 유지에 유리한 영화에 투자가 잘 이뤄지도록 개입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반면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영화 제작에는 압력 넣을 방안을 고민했다. 2015년 1월 2일치 김영한 업무수첩에는 “영화계 좌파 성향 인물 네트워크 파악 필요”라는 대목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 시절 메이저 투자배급사는 물론 감독에게까지 접근한 것으로 확인된 국정원 ‘엔터팀’은 이처럼 청와대가 영화계에 개입할 수 있게 손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엔터팀이 영화계 바닥에서 길어올린 정보는 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된 것은 물론, 영화 제작에 필요한 투자를 풀거나 막는 데도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보수정권 9년 동안 이어져온 ‘공론장 장악 → 우파 콘텐츠 활성화 → 보수 여론 강화 → 정권 재창출’이라는 긴 프로젝트 역시 막을 내렸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져야 할 공론장과 다양성이 보장돼야 할 영화 및 문화 산업에 국가기관이 공작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
영화계 자율성 확보 첫걸음은 진상 규명
한 영화계 관계자는 “이 문제는 보수와 진보로 나눌 일이 아니다. 양쪽 모두 영화나 문화산업이 자율성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두어야 한다. 자신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어떤 곳은 지원하고 다른 곳은 팽개치는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이것을 막으려면 그동안 영화계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명백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