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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③] 2017년 한국영화 속 여성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
김성훈 2017-09-11

세상의 반이 여자라고요? 영화에서는…

<더 킹>

아직 세달이 남아 있긴 하지만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 상당수가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데 그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한국영화 대부분이 남성의 서사인 탓이 크다. 그러다보니 여성 캐릭터가 서사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의 개봉작 몇편을 추려 한계와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더 킹

검찰영화로서 <더 킹>은 수컷의 서사다. ‘한강식(정우성)-양동철(배성우)-박태수(조인성)’로 이어지는 전략수사 3부는 정의나 원칙에 따라 사건을 조사하지 않고 무소불위의 힘(기소권)을 휘두른다. 그들은 룸살롱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카르텔이 견고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태수가 중학생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 송백호(오대환)와 5천만원으로 합의를 유도해 사건을 덮은 뒤 한강식 부장검사의 라인을 타게 되는 곳도 룸살롱이다. 이곳에서 이들이 자자의 노래 <버스 안에서>에 맞춰 접대 여성들과 군무를 추고, 기차놀이를 하는 풍경이 관습적이고 진부한 것도 그래서다. 혹은, 이런 의심이 든다. 혹시 룸살롱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원하던 ‘비주얼’인 건 아닐까? 이 카르텔에 여성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견고한 카르텔을 깨는 건 여성 캐릭터다. 감찰부 소속 안희연 검사(김소진)가 “검찰 역사상 이 정도 쓰레기들이 있었습니까? 착한 사람들 옷 벗기기 전에 이 사람들 옷 벗기시죠”라고 말하는 장면은 시원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더 킹>의 김소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전혜진, <청년경찰>의 박하선 등 이들 영화에서 단 하나뿐인 실무진의 여성이 활용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브이아이피

<브이아이피>

영화의 초반부, 희생된 여성은 김광일(이종석)과 그의 일당이 얼마나 잔인무도한지 보여주는 ‘소품’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김광일 일당에 납치되고, 나체로 성적 학대를 당한다. 카메라는 피범벅이 된 여성 가까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여성의 표정을 길게 담아내고, 폭행당해 생긴 상처를 전시한다. 그녀를 낄낄거리며 쳐다보는 김광일 일당의 시선은 매우 폭력적이다. 김광일이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듣고 있다가 그녀를 목졸라 죽이는 순간은 클로즈업숏으로 강조되기까지 한다. 박훈정 감독은 <씨네21>과 가진 인터뷰(1120호 씨네인터뷰 참조)에서 “소녀가 겪게 될 지옥 같은 고통이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김광일의 악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이 이 영화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었기에 충격을 감수하고서라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의도를 밝혔고, “보통의 다른 남자들보다 젠더 감수성이 부족했다”고도 고백했다. 주인공의 잔인함을 전시하기 위해 ‘여성’을 발가벗기고 폭행하는 장면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양들의 침묵> 같은 영화를 참고하시길.

청년경찰

<청년경찰>

버디무비로서 <청년경찰>은 두 남자주인공을 성장시키기 위한 장치로 여성 납치사건을 꺼내든다.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외출을 나와 클럽으로 간 기준(박서준)과 희열(강하늘)에게 여성은 자신의 혈기왕성한 욕구를 채워줄 하룻밤 상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짝을 찾는 데 실패한 두 남자가 술집에서 한잔하고 나오는 길에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마주친 뒤 그녀를 미행하는 다음 시퀀스가 꽤 오싹하게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다. 누가 먼저 여성에게 말을 걸지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이 그 여성은 범죄조직의 차에 납치된다. 가위바위보는 버디무비로서 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넣은 설정이지만, 가위바위보를 하지 않았더라면 여자를 곧바로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보다, 애초에 인적 드문 길에서 마음에 든다고 낯선 여자의 뒤를 쫓아가는 모습 자체가 여성 관객에게는 공포심을 유발한다. <청년경찰>에서 유일하게 능동적 역할을 하는 여성인 주희(박하선)는 경찰대 훈련 교관을 맡아 의리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별명은 ‘메두사’로 불린다.

공조, 보안관

<보안관>

<공조>와 <보안관> 속 여성들은 앞치마를 두른 채 집 밖을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공조>에서 소연(장영남)은 하루 종일 집에서 남편 진태(유해진)의 뒷바라지를 하고, 소연의 동생 민영(윤아)은 하는 일 없이 형부에게 “300만원만 빌려달라”고 귀찮게 한다. 박봉인 진태는 이들을 힘겹게 먹여살리는 가장으로 그려진다. <보안관>에서 대호(이성민)의 아내 미선(김혜은) 또한 주부다. 김치를 담그고 있는데 샤워하고 나와서 눈치없이 수육을 찾는 남편에게 “수육 같은 소리 하고 앉았다. 주디(주둥이) 삶아뿔라”라고 강하게 받아치는 성격인 그녀이지만, 남편과 남동생(김성균)을 뒷바라지하는 게 전부다. 이들은 남편이 집에 들어올 때만 등장한다. 여전히 한국영화에서 회사 일을 하는 사람은 남자고,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여자다. 영화 속 성역할 고정관념 타파보다 내각 여성 비율 30% 돌파가 우선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박열

<박열>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중에서 남녀 관계를 가장 동등하게 그려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영화의 제목은 <박열>이지만 서사는 박열(이제훈)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두 연인의 데칼코마니 같다. 무정부주의자인 둘은 같은 길을 향해가는 동지이자 부부다. 남녀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불평등한 일제시대, 조선인 박열과 일본인 후미코는 만나서 동거하고, 경찰에 체포된 뒤 재판장에서 선고를 받기까지 서로를 존중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박열은 후미코에 대해 진술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내가 후미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 그녀의 주체적 진술에 맡기겠소”라고 대답한다. 박열의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는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관계를 동등하게 그려내고 포착하는 데 공을 들인다. <박열>이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 모두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다.

여배우는 오늘도

<여배우는 오늘도>

배우 문소리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여배우는 오늘도>는 한국에서 여배우로 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배우 소리(문소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의식해야 한다. 등산갈 때 등산복 대신 패딩 점퍼를 입어야 하고, 아는 제작자(원동연) 때문에 싫은 내색을 못한 채 모르는 남자들과의 술자리에 합석해야 하며, 은행 대출을 받을 때조차 사인 몇장 해주는 일은 필수다. “치과 의사와 사진 한장 찍으면 임플란트 수술비를 50% 할인받을 수 있다”는 엄마의 간청을 이기지 못해 미용실에 들러 메이크업을 한 뒤 치과로 향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하나밖에 없는 딸의 육아는 친정 엄마의 몫이다. 가정과 일 때문에 힘들어하는 소리에게 친구들은 “메릴 스트립이 짱이야. 너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영화를 찍어”라고 달래주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영화 속 소리의 민낯은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기 힘들다”는 여배우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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