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떤 것들은 ‘발견한다’는 감각보다는 ‘발견된다’는 감각으로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예술적 재능을, 학문적 총기를, 또 누군가는 평생을 추구할 아름다움을 그렇게 만난다. 나는 아마도 로잘린 투렉이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평생 잊지 못할 텐데, 바흐와 로잘린 투렉의 조합과, 그 음악이 전과 다른 방식으로 나를 ‘건드린’ 어느 오후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하고 싶다고 생각해왔고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음악에는 당할 수가 없다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음악을 글로 재현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음악은 통해. 언어의 장벽이 없어. 감동을 공유할 수 있어. 우리는 언어의 장벽이 있으니까, 음악가가 정말 부러워.” 이 말은 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어딜 가도 통하지만,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연주자의 바흐를 영어를 전혀 못하는 중국인도 듣고 사랑할 수 있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 연주하는 곡이라고 해서 무조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꿀벌과 천둥>은 전문가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의 강대국 일본의 작품다운 소설이다. <슬램덩크>나 <신의 물방울> 같은 인상을 짙게 풍기는 작품으로, 온다 리쿠는 이 소설로 서점대상과 나오키상을 최초로 동시 수상했다. <신의 물방울>이나 <슬램덩크>와 비슷하다는 것은, 주요 등장인물의 성장을 그려내는 주요한 장치로 대결구도가 등장한다는 것으로, 대결에서의 상대는 주인공과 똑같은 방식으로 ‘천재적’인 혹은 ‘그만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 하지만 <꿀벌과 천둥>이 그런 작품들과 또 완전히 달라지는 포인트가 존재한다. 바로 <꿀벌과 천둥>의 주인공을 단 한 사람으로 좁히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인공으로 네 사람이 차례로 등장한다.
3년에 한번 개최되는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가 이야기의 무대다. 이 콩쿠르의 우승자들이 다음번 세계적인 콩쿠르의 우승으로 이어지는 커리어를 보여준 덕에 클래식 음악계의 유망주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 콩쿠르의 파리 예선에서 깜짝 놀랄 인물이 하나 등장한다. 실제로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가자마 진은 16살로, 이력이라 부를 것이 전무하지만 유지 폰 호프만을 5살 때부터 사사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유지 폰 호프만은 제자를 받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그가 남몰래 키운 제자가 있었다는 말이다. 유지 폰 호프만이 “나는 폭탄을 설치해두었다네”라고 남긴 말의 뜻이 가자마 진일까? 그리고 한때 주니어 콩쿠르를 제패하며 천재 소녀로 불렸지만 어머니를 잃고 무대를 떠났던 소문의 주인공 에이덴 아야가 있다. 압도적인 실력과 매력적인 외모까지 겸비해 스타성을 가진 우승 후보,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도 있다. 여기에 가족을 위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던 대형 악기점 점원 다카시마 아카시가 더해진다. 앞선 천재적인 재능과 비교하면 압도하는 쾌감을 안기는 연주가 아닐지 모르지만 기본기에 철저하고 견고함이 빛나는 연주의 주인공이다.
<꿀벌과 천둥>은 클래식 음악계에 대한 기술도 빼놓지 않고 있다. 콩쿠르가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책 초반에 이어진다. 하지만 연주를 글로 ‘설명’하는 대목이야말로 <꿀벌과 천둥>의 백미다. 특히 기존 연주의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가자마 진의 연주에 대해서라면, <신의 물방울>의 와인 맛 묘사만큼의 과감하고 유려한 과장이 돋보인다. “뭐야, 이 소리는. 어떻게 내고 있는 거지? 마치 빗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내리는 듯한….” 음악을 상상하는 힘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소설이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음악을 굳이 같이 들으며 감상하기보다는 온다 리쿠의 문장만으로 상상하기를 권한다. 지고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는 당신의 음악적 재능을 <꿀벌과 천둥>이 끌어낼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