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한다고 감옥에 가지는 않는다. 거짓말의 법적 책임을 묻는 건 그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을 때다. 거짓 소문을 내서 타인의 평판을 떨어뜨렸다면 명예훼손죄가 성립하고,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적시하면 사기죄가 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공유하는 상식과 일치한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거짓말이 아닌 경우에는 어떨까. 진실을 말하는 것이 죄인가? 한국의 현행법에서는 그렇다. 진실일지라도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면 죄다. 공익목적의 경우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예외를 두고 있지만, 아무런 사심 없이 오로지 공익만을 목적으로 했다는 걸 증명하도록 하고 있어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내려지곤 한다. 사회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 법으로 인해 부당하게 처벌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외치는 이유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경우는 어떨까. 과장이든 비하든 관계없이 당연히 사기다. 그렇다면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훼손한 경우에도 명예훼손이 성립할까. 허위사실 공표도 자신이 했으며, 그로 인한 피해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면, 법정에 서야 할 원고와 피고는 동일인이 될까? 부조리극의 한 장면 얘기가 아니다. 청와대 행정관 탁현민 얘기다. 그는 그가 말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중생과 같은 일을 겪었다는 내용의 기고글을 실은 신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고, 대담집에 실린 문제의 ‘여중생 공유’ 사건을 ‘소설’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쟁점은 또 바뀐다. 그는 대체 왜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책에 쓴 걸까. 그가 품은 여중생에 대한 욕망은 스스로 고백했듯 또래 남자아이들과의 경쟁 심리의 일환이다. 르네 지라르는 주체-대상-매개라는 욕망의 삼각형 구조에서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 사이에 있는 욕망 매개자의 존재를 은폐하고 낭만화하는 것을 낭만적 거짓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와는 달리 욕망 매개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형식이 바로 소설적 진실의 순간이다. 탁현민은 여성에 대한 욕망을 또래 남자들과 공유하고 경쟁해야 비로소 남자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대담집의 말이 설령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나 명백하게 욕망 매개자들의 존재를 드러냈으니 그의 말은 ‘소설적 진실’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가 ‘소설’이라는 말을 진실이 아니라는 말로 사용했다면, 소설가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소설가들이 집단 명예훼손 소송을 걸 일이다. 그게 아니라 ‘소설’이라는 말을 있을 법한 이야기를 꾸며낸 창작물이라는 차원에서 사용한 것이라면, “제가 그 여중생”이라고 말한 그 기고자의 글이야말로, 그의 소설적 진실에 대한 최대의 헌사가 아닌가. 거기에 대고 그 글을 실어준 신문사에 되레 명예훼손 소송이라니, 이 부조리극은 대체 언제 끝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