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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를 본 아저씨의 `사랑에 관한 단상`
2002-04-11

우연, 알고보면 필연

● 나는 우연과 필연,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책들을 깊이 읽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밋밋하게 절충이라고 불리는, 세련되게는 종합이나 지양이라고 불리는 어중간한 태도를 벗어나 어느 한쪽을 편들어야 한다면, 내 생물체적 감수성은 나를 필연과 결정의 편으로 내몬다. 그러니까 나는 우연(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결국 필연이고, 자유(의지에 바탕을 두었다고 생각되는 사태)가 시간의 처음부터 미리 결정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우연과 필연,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결과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한, 그리고 우리가 겪어왔고 겪어갈 시간축 이외에 다른 시간축(들)을 상상하기 힘든 한, 자연스럽게 다다르게 되는 결론이다. 그런 유일한 시간축을 가정한다면, 생명의 발생은 우연적이었다라는 자크 모노의 명제는 생명의 발생은 필연적이었다라는 명제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발설하는 것은 세상을 극도로 부도덕하고 무기력하게 만들 것이다. 모든 것이 이러저러하게 되도록 미리 정해져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과정에 개입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 세상은 힘있고 무도한 자들의 난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대상이나 사태를 비판할 수도 격려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속생각이 어떻든, 세상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미래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로 바꿀 수 있다고 천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천으로써 세상사에 개입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그런 태도나 실천 역시 결국 필연의 그물 안에 있다는 생각,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는 생각은 아예 지워버리거나 오로지 소곤거림 속에만 담아야 할 것이다.

피터 챌섬 감독의 로맨틱코미디 <세렌디피티>에서 새러(케이트 베킨세일)와 조너선(존 쿠색)은 성탄 전야의 어느 백화점에서 처음 만나 데이트를 하지만 그로부터 7년 뒤에야 재회해 사랑을 확인한다. 그 7년은, 사랑이란 우연에 달려 있으므로 일단 자신들의 사랑운을 시험해보아야 한다는 새러의 고집 때문에 생긴 막간이다. 그녀는 지니고 있던 책에다 자신의 연락처를 적은 뒤 그것을 팔아치워 버린다. 그 책이 우연히 조너선에게 도달하면 그들의 사랑은 필연적이 되는 것이다. 새러에게는 우연이 곧 필연이다. 조너선은 새러와 달리 사랑의 행로는 당사자들이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 둘이 서로를 찾기 위해 애쓰기는 하지만, 옳은 것은 새러였다. 조너선에게 그 헌 책이 걸려들어 그가 새러의 행방을 찾느라 약혼녀와의 결혼식에 늦지 않았다면, 그 둘은 재회할 수 없었을 테니 하는 말이다. 사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조너선의 노력마저 그가 겪은 사건들의 고리와 그의 육체를 이루는 성분들에 의해 미리 결정돼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우연은 필연이고, 네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리 결정돼 있었다.

사랑의 발생학이나 형태학에 대해 영화 <세렌디피티> 자체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새러가 팔아치운 지 7년이 지나 조너선 손에 들어가게 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일 것이다. 프록코트를 길게 휘날리며 늘 우수에 젖어 있는 플로렌티노, 프랑스에서 공부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콜레라와 싸우며 보건활동에 전념하는 의사 후베날, 그리고 이 두 남자를 차례로 사랑하는 여성 페르미나가 19세기 말, 20세기 전반부 카리브해 어느 항구 도시를 무대로 삼은 이 소설의 세 주인공이다. 페르미나는 플로렌티노의 낭만적 연서들에 반해 그의 연인이 되지만, 결국 하층계급 출신의 이 청년을 버리고 후베날과 결혼한다. 이들의 결혼은 일종의 정략결혼이라고 할 만하지만, 그래서 그들은 초야(初夜)를 치르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열정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만, 반면에 그들은, 특히 후베날은, 그들이 살아갈 일상의 지루하고 자잘한 세목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51년 9개월 4일간의 긴 기다림 끝에 후베날의 영결식장에서 페르미나와 재회한 플로렌티노는 우여곡절을 거친 뒤 그녀와 함께 영원으로 향하는 선유(船遊)를 떠난다.

플로렌티노의 사랑이 정념의 불꽃으로서의 사랑이라면 후베날의 사랑은 이성의 침전물로서의 사랑이다. 플로렌티노의 사랑은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얘기한 바 결정작용(結晶作用)이 빚어낸 사랑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페르미나가 아니라 제멋대로 상상한 페르미나다. 반면에 후베날의 사랑은 일상의 틈새에서 솟아나오는 사랑이다. 내가 지금도 내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후베날의 사랑일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젊음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사랑이 영구적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시간과 함께 변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른 뒤에도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 사랑은, 사람이 그렇듯, 시간과 함께 변한 사랑일 것이다. 만약에 지금도 내 아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사랑이 바로 이 사랑, 시간과 함께 변한 사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