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평범한 노동자였다.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타의 세계에선 명품으로 통하는 고급 브랜드 기타를 OEM으로 만들던 노동자, 기타 만드는 일로 잔뼈가 굵은 그이가 어느 날 기타의 선율에 홀딱 빠져 기타리스트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에게 날아온 건 해고 통지였다.
음악을 사랑하노라 떠들던 박영호 사장은 창문을 만들면 노동자들이 딴생각을 한다며 톱밥과 페인트 냄새 가득한 공장에 창문을 내지 않았고, 돈을 아끼려 청소업체를 부르는 대신 노동자들을 굴뚝으로 올려 보내곤 했다. 고로 김경봉은 기타 만들던 손으로 굴뚝 청소까지 하는 ‘어쩌다 보니 만능 노동자’였던 것이다. 일회용 분진 마스크 하나로 일주일을 버텼고, 제때 지급되지 않는 목장갑을 빨아 쓰는 건 예사였다. 자본금 200만원으로 시작한 콜트콜텍이 세계 기타 시장의 30%를 차지하는 굴지의 기업이 되면서, 박영호에겐 1천억원이 넘는 돈이 굴러왔다. 반면 노동자에게 굴러온 건 해고 협박과 모욕, 잔업 그리고 잦은 산업재해였다.
박영호가 최저 수준의 임금마저 비싸다며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기로 했을 때, 그리하여 해고 통지가 날아왔을 때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법정투쟁과 점거투쟁, 단식투쟁과 고공농성 등 더 무슨 투쟁을 해야 할지 되묻고 싶을 만큼 그들은 싸웠다. 법도 정치도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않았다. 하필 이명박근혜의 시절이었다.
2007년에 해고된 이들이, 2017년의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이제 곧 4천일. 상처를 안고 동료들은 떠났지만 남은 네명, 김경봉과 방종운, 임재춘, 이인근은 떠나지 않았다. 떠나지 못했다. 기타를 만들던 그들이 이제 기타를 쥐고 노래를 부르며 “음악 없인 삶도 없다”고 외친다. 기타리스트 김경봉, 40대 후반의 해고 노동자이던 그가 이제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기타에선 피울음이 흐른다. 그것은 음악이지만 음악만은 아니다. 한 노동자의 인생을 이렇게 길바닥에 패대기치는 게 이 땅의 넉넉한 자본인가, 이 땅의 지엄한 법이며 정치인가. 콜트콜텍의 싸움은 져선 안 되는 상징이 되고 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온몸 투쟁이 변치 않는 울분과 후회로만 남는다면 이곳을 사회라 불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