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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류미코의 <이누야샤>
2002-04-11

개냐 요괴냐 인간이냐

좌충우돌 대소동 코미디의 진국 <시끌별 녀석들>, 개성만점 동거 로맨스코미디의 고전 <도레미 하우스>, 그리고 소년 변신 무술코미디의 최고 히트작 <란마 1/2>. 다카하시 류미코의 만화들은 그야말로 일본 만화가 이어온 대중오락 노선의 핵심에 걸쳐져 있는 작품들이다. 누구든지 이해하기 쉽고, 한번 열광하면 10권 정도는 쉽게 달려가는 에너지 넘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단편 연작 <인어의 상처> 등을 보면, 다카하시가 그려낸 일본 중세의 세계가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섬뜩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언젠가 이 세계를 본격적으로 그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게도 된다. <이누야샤>는 바로 이 일본 중세의 세계, 요괴와 도깨비가 뛰어놀고 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는 세계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작품은 시끌별-도레미-란마의 계보를 잇는 다카하시의 메인 인기물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다.

주인공 가고메는 현대 도쿄에서 살아가는 발랄한 소녀다. 하지만 유서깊은 신사에서 고리타분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별로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다. 그녀는 어느 날 사당 안의 우물에 빠져 전국시대로 날아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나무에 박혀 있던 이누야사의 봉인을 풀게 되고 그와 얽힌 기묘한 인연을 깨달아가게 된다.

롤플레잉 게임의 공식

<시끌별 녀석들>의 외계인들이든, <란마 1/2>의 반인반수 변신동물들이든, 다카하시는 다양한 피조물들을 만들어 요란한 소동을 벌이는 일을 좋아한다. <이누야샤>에 와서는 일본 전래의 요괴, 귀신, 도깨비들을 불러내서 또 한번의 난리법석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실 너무나 전형적이며 80년대 스타일에 묶여 있는 그녀의 주인공들보다 이들 조연들을 만나는 것이 훨씬 즐겁다. 그런데 다른 작품의 피조물들이 특별한 선악의 징표를 드러내지 않는 서커스단의 광대들로 보인다면, 이번에는 확실한 악역들이 등장해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만화의 구조 자체가 강력하고 끊이지 않는 악역을 필요로 한다.

가고메가 지니고 있던 ‘사혼의 구슬’은 엄청난 요력을 발휘하게 하는 이 만화의 ‘핵심 아이템’으로, 이누야샤와 송장 까마귀의 싸움 속에서 가고메가 활로 쏘아 산산조각 내버린다. 이후 주인공들은 부서진 구슬의 조각을 찾아가는 분명한 목표를 얻게 되고, 다른 요괴들 역시 이 구슬을 얻기 위해 달려드는 확실한 승부 구조가 마련된다. 모두가 <드래곤 볼> 이후에 확립된 소년모험만화의 공식, 그리고 최근 만화계를 강하게 잠식해 들어온 롤플레잉 게임구조에 귀착된다.

이누야샤(犬夜叉)는 우리말로 하면 ‘개 도깨비’, 혹은 ‘개 요괴’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서국을 지배하던 강하고 늠름한 개 요괴와 인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반요(半妖)다. 이것은 요괴의 순혈을 지닌 형 셋쇼마루와의 숙명적인 대결을 예고하는 한편, 심리적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 가고메와 동맹을 맺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반인이라는 설정은 일본 만화사에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요괴물의 본령인 미즈키 시게루의 <게게게의 기타로>는 인간과 유령족 사이에 태어났고, <데빌맨>은 인간이 악마족의 본성을 받아들인 형태, <기생수>는 인간과 기생생물의 연합체, <암즈>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다.

이들은 모두 양 존재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을 겪고,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사색의 열쇠가 된다. 하지만 <이누야샤>로부터 그렇게 강렬한 철학적 고뇌를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다. <란마 1/2>이 남녀의 성적 긴장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는 거리가 멀듯이, 반요라는 설정도 캐릭터의 성격과 갈등구조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의 육체적 모험에 비해 정신적 모험은 큰 파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이 요괴에게 바라는 것은?

이누야샤는 여러모로 손오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의 호들갑스럽고 기고만장한 성격도 그렇고, 가고메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녀에게 붙잡혀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점도 그렇다. 이누야샤의 목에 걸린 염주는 손오공의 고리에 다름 아니고, 가고메는 그가 날뛸 때마다 “앉아”라고 명령한다. 이것은 이누야샤가 ‘개’ 요괴라는 점과 어울려 제법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해낸다.

어차피 <서유기>든 <이누야샤>든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그 인간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틀을 벗어난 요괴를 통해 마음껏 욕망을 발현하면서도 그가 인간의 힘에 의해 통제되는 충직한 개가 되어줄 것을 바란다. 현실 속의 인간이란 참으로 중심없이 이랬다저랬다 하기 마련이고, 다카하시는 그러한 야비한 면모를 노련한 개그터치로 표현해내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다. <이누야샤>는 <란마 1/2>이 그랬듯이 그 존재 자체가 다카하시의 만화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