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아픈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 건강을 자신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제대로 먹고 꾸준히 운동하며 투병하기 전보다 더 건강하게 사는 모습을. 그전보다 이기적이 되는 경우도 봤다. 놀랄 일도 아니다. 삶이 언제고 갑작스럽게 끝나버릴 수 있음을 경험하고 살아남았다면 누굴 위해 시간을 허비하겠는가.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는 여러 면에서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이 두권의 책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최근 갑작스레 두 번째 암 수술을 받게 된 분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던 많은 사람은 회복에 확신이 생기면 열렬한 운동 애호가가 되곤 했다. 큰 병을 앓은 사람일수록 “나는 아프기 전보다 더 건강해진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두 번째 수술을 받은 분은 첫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고 믿던 시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수술 전과 다름없을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픈 몸을 살다>를 읽다 보니 근심이 생겼다. 혹시 그분은 건강을 회복한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아픈 몸을 살다>를 쓴 아서 프랭크는 서른아홉에 심장마비를, 마흔에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 1946년생인 그는 지금도 건강히 대학 강의를 비롯해 다양하게 활동하는데, 이 책에서 암 투병부터 간병, 가까운 이의 죽음에 뒤따르는 애도에 이르기까지 병과 관련된 화제를 폭 넓게 다룬다. 아서 프랭크는 병과 싸우는,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경험이 모험이자 경이를 배우는 기회라고 설명한다. 여기까지 말하면 자기계발서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 기회를 어디까지나 ‘위험한 기회’라고 강조한다. 암으로 투병하며 경험하는 통증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수준이며, 생업을 지속하기 어려우니 병원 밖의 삶도 즉각 위기에 처하며, 환자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도 대응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서 프랭크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아프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방식의 삶이라는 점이다. 질병 상태로 살아내고 나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아예 바꾸어놓는. 다른 말로 하면 ‘회복’은 아프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기보다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고 그 상태를 개선해나가는 성질이어야 한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
하지만 이런 성장 혹은 변화의 ‘이야기’를 주변에서 강요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애도의 문제를 보자. 이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잠긴 사람은 ‘적당한 시점’에 애도를 마치기를 요구받는다. 슬픔에 잠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당혹감은 상대를 이해하게 돕는 대신 그에게 정상성을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암 환자들은 ‘긍정적인 성격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압박을 받는다.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느라 환자는 감정노동까지 해야 한다. 대체 누구를 위한 긍정인가? 환자의 고통을 나누기보다 그의 긍정적인 상태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의 ‘정상성’에 갇힌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투병 중인 사람을 비난하는 태도 역시 문제가 된다. 혹시 그간의 생활방식 등이 암을 불러온 것이 아니냐는 식의 시선 말이다. 병을 불러온 책임은 개인의 것으로 축소되고, 환자는 그 안에 고립된다.
고통을 겪는 순간만큼 인간이 고독해지는 때가 또 있을까.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몸을 뒤틀어도, 타인은 그 고통의 한 자락도 나누어 갖지 못한다. 그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죽을 운명을 타고나는 존재의 ‘인간다움’의 증명이라고 하면 과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