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싸움꾼이었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그는 오늘도 싸움꾼이다.
누군가, 당신 필름에 가장 많이 담긴 이가 누구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문정현입니다.
그의 곁에서, 그의 싸움을 바라보며, 그 싸움을 사진기에 담으며, 그와 함께한 시간이 어느새 20년이 되어간다. 그는 이팔청춘 투사였다. 유신의 칼에 죽임당한 인혁당재건위 관계자들의 주검을 온몸으로 지킬 땐 말 그대로 청춘이었겠지만, 강산이 서너번 바뀌어 육신이 늙은 뒤에도 펄펄 뛰고 날며 싸웠다. 진압경찰의 고착을 뚫고 쓰레기차에 기어올라 포효했다. 미대사관 앞 은행나무에 올라 불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규탄했다. 매향리 드넓은 폭격장의 철조망을 자빠뜨렸다. 어린 두 학생을 압사시키고 발뺌하는 미2사단 앞에선 삭발했다. 국방부가 파헤친 대추리 들녘 구덩이에 뛰어들어 내 몸까지 파헤치라고 절규했다. 용산참사 참혹한 망루를 올려보며 그것이 십자가인 듯 기도했다. 해군이 파괴한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을 보듬기 위해 파도치는 테트라포드를 목숨 걸고 건넜다. 경찰에 떠밀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 되었다가 기어이 일어나 길 위에 다시 섰을 때 그를 말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런 그도 새파란 용역 깡패에게 흰수염 한 움큼을 쥐어뜯기고 주저앉았다. 바닥에 버려진 한 움큼의 수염을 망연자실 바라볼 때 그를 덮쳤을 치욕을, 나는 가끔 헤아려본다.
누군가 그를 분노한 사제라 말한다. 나는 속으로 분노한 사자였지, 라고 답한다. 분노만이 그의 에너지였다. 약한 이들을 짓밟는 강한 자들을 향한 분노. 육신이 낡아가건만 분노와 한탄은 더욱 깊어 견딜 수 없던 어느 날부터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어언 10년이다. 그의 젊은 벗들은 분노가 새겨진 나무판을 팔아 집 한채를 지으려 했다. 거리에서 싸우는 비정규 노동자의 연대쉼터 ‘꿀잠’.
멀리 제주에서 올려 보낸 한 트럭의 새김판을 찬찬히 읽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처절한 사람이 있었다. 처절한 사랑이 있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백기완·문정현, 두 어른의 대담집 원고를 읽다가 한 대목에서 멈춘다. “한발짝만 가자, 한발짝만 더 가자, 가다가 죽더라도.” 문정현은 오늘도, 길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