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이가 아니고 ‘詩누이’다. 시(詩)를 편안하게 읽도록 도와주는 누이. <詩누이>는 일상을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종종 떠올리는 단상들, 유년 시절의 추억 등을 귀엽고 다정한 그림체로 풀어낸 일상툰 에세이면서, 곱씹어 읽어보고 싶은 현대시들과 함께하는 특별한 책이다.
어린 시절, 절인 배추를 지고 시장으로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자매는 종이접기를 한다. 종이학도 접고 동서남북도 접고 비행기도 접고 종이공도 접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깨면 엄마가 돌아온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 에피소드를 마무리한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는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사회적 이미지를 위해 ‘가면’을 쓰고 안정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 혼자 있을 때는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지낸다고 고백하며, 나와 타인의 ‘가면’에 감정을 소비하던 날들을 돌이켜보는 에피소드에는 나희덕의 <돼지머리들처럼>이 함께한다. “하루에도 몇번씩 진열대 위에 얹혀 있다는 생각,/ 웃어, 웃어봐, 웃는 척이라도 해봐,/ 시들어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집어올린다.”
만화와 시가 함께하는 구성이 책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만화를 읽으며 고양이의 나이듦을 서글퍼하는 ‘집사’의 마음에 공감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연락 온 동창이 하필이면 다단계 회사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낭패를 본 사건을 읽으며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감상들이 현대시와 만나 더 깊고 풍부한 상념으로 나아간다. 몰랐던 좋은 시를 발견하는 기쁨도 함께한다. “그녀가 그년으로 불리기까지/ 딱 한 사람/ 딱한 사람만/ 지졌다가/ 지켰다가/ 우리 이러지 말자.”(<우수의 소야곡>, 김민정)
시의 마음, 만화의 마음
졸업하고 나니 IMF였다. 군대 간 남자친구에게 보기 좋게 차였다. 월미도로 가는 2번 버스 안에서 펑펑 울었다. 송애교도 아니면서 혼자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인천 앞바다에서 드라마를 찍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고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적은 월급으로 학자금 대출, 월세, 공과금을 내고 나면 언제나 빠듯했다. 청춘이 뭐 이렇게 시시한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근사한 미래로 갈 수 있는 황금 마차의 주인공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럼 구인정보지를 들고 세상을 기웃거렸다. 모든 게 서툴고 촌스러웠다. 불안했고, 앞이 캄캄했다. 도착하지 않은 나의 미래가. 어쩌다 기분을 내고 싶어서 산 음반이나 장미가 형편에 맞는지 스스로 눈치가 보였다. 다 정리하고 시골에 내려가 영화표를 팔면서 심심하게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편벽한 마음에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충고가 얼마나 박정하고 무심하게 들리던지. 터벅터벅 건너갔다. 반짝이지 않았던 20대의 날들을.(219∼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