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남겨두고 자살을 결심한 남자, 테드. 그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총을 막 머리에 겨눈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수수께끼의 방문자는 “당신이 서재에 놓아둔 9mm 권총으로 뭘 하려던 중인지 다 알아요”라고 외치니, 테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경청한다. 그는 테드에게 이왕 죽을 거, 법망을 운 좋게 피한 질 나쁜 범죄자를 죽이라고 한다. 테드는 그 범죄자를 손쉽게 죽이고, 이어 테드처럼 자살을 결심한 또 다른 사내도 죽인다. 이쯤되면 소설은 자살에서 사적 정의 실현을 위해 살인 집행으로 방향을 튼 사내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그렇게 빨리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스릴러 장르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라면 도입부가 어딘지 좀 삐걱대며 굴러간다는 사실을 눈치채리라. 어느 순간 소설은 반전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어느 순간 또 반전이 나온다. 이야기에 올라탄 독자들은 힘차게 상승하여 거침없이 낙하하는 롤러코스터식의 쾌감을 맛보게 된다.
연쇄살인, 심리상담과 정신병원, 트라우마와 조각난 기억 같은 키워드로 만듦새가 매끈한 드라마를 만든다면 <다음 사람을 죽여라>를 그대로 대본으로 써도 좋을 것이다. 유년 시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업가, 일에 욕심이 많은 정신과 의사 등 설정이 탄탄한 캐릭터들과 빠른 전개, 살인을 저지르는 자의 잔인한 내면 묘사에 독자들이 잠시 호흡을 고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로맨스가 등장하는 것까지 갖출 건 다 갖추었다. 분량은 많지만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고, 저자가 촘촘히 심어둔 단서들이 막판에 하나의 퍼즐처럼 맞아들어가는 결말이 훌륭하다. 기대한 만큼의 재미를 주는 책이라 장르소설 독자들이 반길 것이다. 휴가지에 챙겨갈 책으로도 좋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싶다면
테드는 극도로 치밀하게 자살을 준비했다. 삶이 잘 풀리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막판에 충동적으로 한 결심이 아니었다. 애처롭게 관심을 호소하면서 일을 망치는 한심한 자살미수자는 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적어도 테드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신중했다면 린치가 어떻게 그의 계획을 알았겠는가? 완벽한 옷차림을 하고 환하게 웃는 이 낯선 청년은 테드가 가진 권총의 구경과 권총을 놓아둔 장소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테드가 자살하려 한다는 말이 즉흥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혹시 그냥 던진 말이었다면 상당히 운 좋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린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테드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한기가 들었다가 이윽고 신경이 예민해지며 눈앞의 적을 물리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게 되는, 특유의 오래되고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체스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지 수십년이지만 틀림없었다. 테드는 유쾌함마저 느꼈다.(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