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은 내게 언제나 서늘한 기억이다. 개인 홈페이지에 쓴 잡글 덕에 ‘<디 워> 사태’ 한복판에 끌려갔고 곧장 매국노로 단죄되었다. 충무로로부터 배척당한 코미디언이라는 피해자 서사에 빙의된 대중의 분노는 졸지에 일개 무명감독인 나를 충무로 대표 주류라고 몰아세웠다. 어쩌면 그때부터 민감해졌나 보다. 왜 대중은 피해자 서사에 열광할까. 반면 정작 다른 약자들 서사에는 왜 그토록 둔감해졌을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은 아직 유효한 것 같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어떤 종류이든 사회의 시선을 끌려면 스타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하에서 대중이 앞다투어 ‘피해자 되기’에 골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누가 더 피해자인지를 경쟁적으로 전시하는 인정투쟁의 세계.
누군가는 이것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가져온 ‘평등’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형식적으론 평등하지만, 실제로는 불평등이 격화되면서 모든 권위와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한다. 각개전투의 치열한 경쟁 속에 분리된 채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준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기계발’, 또는 ‘고립된 원한’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유폐된 채 불신과 원한의 ‘피해자 서사’로 세계를 해석하는 주체화의 경로.
이 세계에선 자신이 가장 피해자다. 각자 자신이 가장 루저임을 외치는데 타자의 고통이 보일 리 없다. 연대도 없다. 중첩된 고통을 양산하는 권력의 구조를 직시할 혜안도 없다. 매사 분노로 끓어오르지만, 정작 세계가 어떻게 구성됐는지 그 구조의 언어에는 당도하지 못한다.
타자에 대한 혐오는 바로 이런 폐쇄된 주체로부터 온다. 반지성주의, 그것은 타자와 외부를 반영하지 않는 나르시시즘이다. 타자의 언어는 오염이고, 지성의 언어는 교활한 권위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한 것은 자신의 고통뿐이다. 순수 시민, 순수 여성, 순수 유가족 같은 근본주의 언어들이 난립하는 이유다. 또한 정보와 지식들도 확증 편향의 지평 안에서 선택적으로 명멸한다. 내 편에 이로운 정보가 의로운 것이다. 버젓이 어용 지식인이란 말이 구가되고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자신들이 가장 피해자라는 일부 여당 지지자들이든, 남성들도 당하고 사는데 페미니즘은 역차별이라 비토하는 사람들이든, 게이들도 남성이기 때문에 비판 대상이라는 일부 페미니스트든, 결국은 자신이 가장 피해자다. 혐오와 배제의 알리바이가 작동되는 방식이다. 과연 이 세계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그래서 어떻게 뜯어고쳐야 하는지를 구조적으로 파헤칠 통찰력 대신, 피해자들의 비명만 가득한 시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사슬의 크기를 경쟁적으로 전시하는 시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세상 풍경은 변함없고, 우리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