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보니 그의 이름을 안 지 꼭 30년이다. 그때 나는 어렸다.
얼굴을 본 건 오랜 시간이 흐르기 전이었다. 그때도 나는 어렸지만, 성인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그를 거리에서 보았다. 처음 사진기를 들이댄 건 길어야 20년 짧다면 15년 전이리라.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의 인상은 편치 않았다. 사진기를 둘러멘 자들이 잠시 앞을 가릴라치면 “야, 이놈들아!”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불편했다. 나를 지칭한 나무람이 아니라 해도 모욕감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사진기를 든 양아치거나 훼방꾼인가. 나 자신이 싫었다. 동시에 그를 좋아하지 않게 됐다.
3년 전, 해고됐다 복직한 노동자 김수억이 다시 받은 첫 월급을 털어 ‘스승의 날’을 마련하고 싶다 말하고, 함께하자는 손들이 웅성댈 때 사진쟁이들에게 요청이 날아왔다. 그에 관한 사진영상을 만들어 달라는 거였다. 기꺼이 도왔지만 그가 좋아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밤, 주름진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날 밤 노동자 김수억은 왜 그런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는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털어놨다. 싫던 마음은 어느새 내 마음이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거리에서 싸우는 이들이 내 작업의 ‘주인공’이 되고, 어쩌다보니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어쩌다보니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연대쉼터 ‘꿀잠’을 짓는 일에 뛰어들게 되었다. 우리는, 마음은 있으나 돈이 없었다.
그는 우리 편이었다. 집 짓는 일을 크게 반겼다. 나와 친구들이 그의 삶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로 작당모의하고 붓글씨를 써달라 했을 땐 단호했다. 거절이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도 했다. 끈질김을 누가 가르쳤나. 그가 가르친 것이었다. 우린 거듭 찾아가 늙은 당신을 괴롭혔고, 끝내 그가 졌다. 약속한 서른여섯점의 붓글씨를 주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과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는지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당신의 삶을 새긴 붓글씨를 팔아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한푼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되레 밥을 얻어먹었다. 꿀잠, 지금 그 집이 지어지고 있다.
지난겨울, 여든여섯의 당신은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참석하며 하루 전부터 물을 마시지 않았다 했다. “늙은 내가 오줌이 마려워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나아간다는 건, 여럿을 힘들게 하는 일이야.”
백기완. 나는 이제 그를 사랑한다. 그를 여전히 거리에 머물게 하는 이 시대는 몹시도 불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