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변희봉, 틸다 스윈튼, 안서현, 스티븐 연,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대니얼 헨셜과 봉준호 감독(왼쪽부터).
6월 14일, 아시아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옥자> 기자회견이 열렸다. <옥자>에서 미란도 기업의 CEO 루시/낸시 미란도를 연기한 틸다 스윈튼, 루시와 낸시 미란도 사이에서 움직이는 프랭크 도슨 역의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동물해방전선 ALF 멤버 케이 역의 스티븐 연, 블론드 역의 대니얼 헨셜, 미자 역의 안서현, 미자의 할아버지 희봉 역을 맡은 변희봉 그리고 봉준호 감독이 참석했다. “고향에 온 기분이다. 아름다운 <옥자>를 고향인 한국에 데리고 온 느낌이고, 이제는 우리가 다 한국 영화인이란 생각이 든다.” 틸다 스윈튼의 첫 인사말에서부터 <옥자>에 대한 이들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와 뉴욕 프리미어 행사에 다녀온 소감은.
=변희봉_ 살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 것 같다. 세상에, 내가 별들의 잔치를 보고 왔다. (웃음) 칸에서도 한 얘기지만, 70도로 기운 고목나무에 꽃이 핀 기분이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또 그 고목나무에서 이만한 움이 터오는 게 아닌가. 정말 감사하다.
=안서현_ 칸영화제가 모든 배우들이 쉽게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닌데 훌륭한 배우들, 세계적인 감독님과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었다는 게 영광스럽다.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한 것 같다.
-칸영화제 기간에 프랑스극장협회에서 넷플릭스 작품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고 한국에서의 극장 개봉 상황 역시 좋지 않다. 국내 개봉 문제와 관련해서 서운한 마음은 없나.
=봉준호_ 의도한 것은 아닌데 가는 곳마다 논란을 몰고 다니고 있다. (웃음) 칸영화제의 경우 <옥자>가 초청되기 전에 프랑스 내부에서 법적 정리가 먼저 이루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초청해놓고 논란을 벌이니까 민망해지더라. 넷플릭스 제작 영화로 칸을 찾은 노아 바움백 감독이나 나나 영화 만들기에 정신없는 사람들인데 프랑스 국내 영화법까지 공부하면서 영화를 찍을 순 없지 않나. 한국은 양상이 다르다. 최소 3주의 홀드백을 원하는 멀티플렉스쪽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반면에 넷플릭스의 동시 개봉 원칙도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옥자>는 넷플릭스 가입자들이 낸 서비스 이용료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 볼 동안 가입자들은 좀 기다리세요’라며 시청의 우선권을 뺏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면 왜 이런 논란이 생긴 건가, 따져보면 내 영화적 욕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화 찍으면서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과 ‘사람들이 큰 화면에서도 <옥자>를 많이 보면 좋겠다’는 얘길 종종 나눴다. 그런 내 욕심과 취지에 배급사도 공감했기 때문에 극장 배급에 나섰다. <옥자>가 스트리밍 영화의 규정을 정리하는 신호탄 역할을 한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멀티플렉스가 아닌 극장들, 대한극장, 서울극장, 대구 만경관 등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극장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옥자>를 준비하면서 잠시 비건(완전 채식)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안다. 지금은 해산물과 유제품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 되었다고.
봉준호_ 남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선 가끔 닭고기, 소고기를 먹고 있다. (웃음) 실제로 두달간 비건 생활을 했다. 2015년 <옥자> 시나리오를 쓸 때였는데,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거대 도살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도살장이란 말을 싫어하고 대신 ‘비프 플랜트’라는 말을 쓴다. 현대적인 축산공장이라는 자부심이 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더 섬뜩한 느낌이 든다. 하루에 5천 마리 이상의 소를 도살하는데, 영화 후반부의 도살장 장면이 충격적이라는 분들도 계시지만 실제 공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20배는 부드럽게 표현한 거다. 가장 압도적이었던 건 도살장의 냄새, 피와 배설물과 뼈 녹는 냄새가 뒤섞인 악취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더라. 그렇다고 육식에 반대한다는 건 아니다. 인류는 수천년간 육식을 해왔다. 다만 가혹하고 잔인한 환경에서 동물을 대량생산 파이프라인의 일부분으로 취급하는 건 되짚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여러 문화를 넘나드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 스티븐 연의 경우 한국계 미국인이고 영화에서도 그 정체성을 그대로 가져간다. 특히 할리우드에선 아시아계 배우들에게 스테레오 타입의 역할을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작업은 어떤 경험이었는지.
=스티븐 연_ 케이는 내게 정말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현장에서도 케이로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인데 한국인과 미국인의 경계를 오가는 경험, 영화와 현실을 오가는 경험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런 것들이 초현실적 경험 같았다고 할까. <옥자>에선 그런 내 정체성의 경계가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할리우드에선 외국계 배우들을 특정 타입으로 재단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인정돼야 할 부분이지만 그것 역시 일부분일 뿐 나라는 존재 전체를 표현하지는 못한다. <옥자>의 캐릭터 포스터만 봐도 누구 하나 동일한 사람이 없지 않나. 영화 속 ALF 역시 개성 강한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ALF라는 집단에 모이게 됐을까, 이런 질문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이처럼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것 같다.
봉준호_ 문화적인 경계를 넘어보고 싶다거나 다양한 문화를 섞어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가 늘 우선이다. <설국열차>(2013)는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기차에 타고 있는 이야기인데 그런 상황에서 남북한 사람들만 있으면 이상하지 않나. (웃음) <옥자>도 다국적 거대 기업에 의해 아시아의 깊은 산속에 있는 소녀와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CEO가 연결되는 이야기니까 여러 문화권의 사람이 나오고 여러 스탭이 섞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도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메커니즘은 어느 나라나 동일하다. 게다가 이미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고 섞여 있는 시대다. 야구장, 농구장에만 가도 외국인 선수들이 뛰고 있지 않나.
-전작에서부터 무언가를 지키려는 소녀 캐릭터가 자주 등장했다. <옥자>는 가장 강력한 버전의 소녀가 등장하는 영화인데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글로벌 기업의 CEO 역시 여성이다. 여성 캐릭터를 영화의 중심에 둔 이유가 있다면.
봉준호_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소녀들이 강인할 때 아름답다고 느낀다. 소년들이 강인할 때보다. 안서현양도 <옥자>의 시나리오를 보고 ‘내가 옥자의 보호자군요’라면서, 자기보다 덩치가 몇배는 큰 존재인 옥자를 지켜주는 존재가 미자라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미자도 소녀이고, CEO도 여성이고, 옥자도 암컷인데 특별히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은 아니다. 스토리를 만들어가면서 세축이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틸다 스윈튼_ 그건 페미니즘적 접근이라기보다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영화 속 여정의 과정에서 미자가 하는 선택들이 중요했다. 그 선택은 미자의 여성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미자는 여러 선택지를 갖지만 사랑, 진정한 커넥션을 택한다. 영화는 보편적이고 범우주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둠이 내린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돼보는 경험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때로 어떤 창작자는 현상을 단순화하거나 쉽게 일반화한다. 봉준호 감독은 그렇지 않다. 단적인 예로 봉 감독 영화의 중심엔 늘 여성이 존재하지 않나. 그의 영화에서 여성은 언제나 영화의 핵심이었다.
-알렉사 카메라를 사용했다. 촬영에선 어떤 점을 부각하고 싶었나. 또 뉴욕 장면 등에서 틸다 스윈튼에게 도움받은 게 있는지.
봉준호_ 알렉사65라는 카메라를 썼다. 자연광에서 대자연을 찍을 때 압도적인 이미지를 선사하는 카메라다. 햇빛 아래 날아다니는 날벌레까지 느껴지기 때문에 그곳에 실제로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강원도 산골에서 맨해튼 한복판으로 이어지는 복잡하고 긴 여정을 함께 체험하며 따라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그 카메라의 위력을 올바로 느끼기 위해서는, 또 극장 얘기를 하게 돼 죄송하지만, 4K 상영관이 마련된 부산 영화의전당이라든지 파주 명필름아트센터, KU시네마테크 등에서 보면 이미지의 강렬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틸다에겐 여러 측면에서 도움을 받았다. 한국 배우 중 송강호, 변희봉 선생님이 그러한데, 왜 변희봉 선생님이 <괴물>에서 “오징어 다리가 구개다 구개” 이런 애드리브를 하시지 않나. ‘아홉개’가 아니라 ‘구개’라고. 그처럼 틸다 역시 특별한 언어 사용 능력을 지녔다. <설국열차>에선 영국 요크셔 악센트를 썼는데, 언어의 뉘앙스의 경우 내가 아무리 영화적 비전을 가지고 있어도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시나리오작가 존 론슨과 틸다를 따로 만나게 해준 적도 있다. 영어 하는 사람들끼리 실컷 얘기를 주고받으라는 의미에서. 거기서 쏟아져 나온 대사들이 시나리오에도 반영됐다.
틸다 스윈튼_ 나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라 내게도 미국은 외국이다. 어쩌면 봉 감독보다 내게 더 미국이 이국적일지 모른다.
-<옥자>가 전하는 궁극적 메시지는 뭐라고 생각하나. 혹은 당신에게 <옥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작품인가.
=대니얼 헨셜_ <옥자>는 내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그 희망은 인류에 대한 희망이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들고 어두운 상황도 많지만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희망을 갖게 된다. <옥자>를 보는 분들도 그런 희망을 느꼈으면 좋겠다.
틸다 스윈튼_ 메시지가 있는 영화라기보다 하나의 태도를 드러내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미자와 옥자의 여정을 보면서 우리는 생존을 위한 험난한 여정에서 사랑과 신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도 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 영화는 그런 태도를 보여주려 한다.
스티븐 연_ <옥자>가 좋았던 것은 여성이 힘을 가지는 영화라는 점이었다. 여주인공이 험난한 길을 헤쳐나가는 이야기 자체가 좋았다.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_ 무엇보다 사랑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다. 자신을 완벽히 사랑할 수 있다면 미자처럼 그 사랑을 나 아닌 다른 존재와 공유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는 용기와 신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자는 자신을 믿고 그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상대로 싸운다. 훌륭한 영화는 우리를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옥자>는 경이롭고 매혹적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