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에 있어 꼼꼼한 취재만으로 메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로 일하다 지난 2월 변호사로 전업한 소설가 도진기는 이를 극복할 강점을 갖고 있다. 법 분야에 대한 디테일한 서술이 가능한 그는 보다 촘촘한 장르 소설을 써왔다.
<킬러퀸의 킬러>를 제외하면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공개된 적이 있는 작품들이다. <악마의 증명>은 곳곳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소재의 8작품을 한데 모아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다. 단편집의 이름이기도 한 <악마의 증명>은 강도 살인 사실을 부인하는 일란성쌍둥이 형제와 호연정 검사의 두뇌 싸움이다. <정글의 꿈>은 젊은 시절 열정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노인이 병실에서 예전에 했던 조각을 다시 시작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선택>은 <악마의 증명>에 등장한 호연정 검사가 변호사로 전향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연정은 절벽에서 추락해 모녀가 숨진 교통사고를 다루다가, 석연찮은 부분을 발견한다. <외딴집에서>는 남들은 백수라고 여기지만 스스로를 탐정이라 생각하는 ‘나’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의 집에 들어갔다가 겪는 일이다. <구석의 노인>에서 한 국밥집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맡게 된 변호사 성호는 법정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신경 쓰인다. <시간의 뫼비우스>의 민경은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자신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 말하는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 <킬러퀸의 킬러>는 살해된 남편의 주변 인물을 만나게 된 추리소설 작가가 남편에 대한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는 사형선고가 난 범인에게서 이상한 편지를 받은 부장판사의 이야기다.
초기작 <악마의 증명>이 법정을 중심에 뒀다면, 최근 작품으로 올수록 법조계에서 파생되는 의학, 범죄수사 등 다양한 분야의 배경지식을 과감하게 펼치는 스토리가 많다. 만족스런 뷔페에 온 것처럼 각양각색의 미스터리 소설을 빠른 호흡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전직 판사의 미스터리 단편집
CCTV에 나온 사진이나 옷, 범행에 쓰인 칼을 보면 둘 중 하나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둘 중 누구입니까?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 구분해낼 수 있습니까? 박철과 박성 두 사람에게 놓인 혐의의 양과 질은 똑같습니다. (중략) 피고인이 유죄일 확률은 50퍼센트이지만 무죄일 확률 또한 50퍼센트입니다. 절반의 확률, 절반의 증명으로 피고인을 유죄로 인정하여 살인죄로 처단할 수는 없습니다. 재판은 제비뽑기가 아니니까요.(27쪽)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타살의 의혹만이라도 강하게 제기하면 보험회사는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지 못한다. 만약 거절한다 하더라도 보험회사를 상대로 보험금지급소송을 제기하면 이길 수 있다. 민사소송의 구조상 원고측에서 ‘자살이 아니다’라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험회사가 ‘자살이다’라는 점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살의 의심만 강력히 부각시키면 된다. 그리고 이 사건에선 타살의 의심이 충분하다.(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