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 있다.” <넛셸>의 화자는 아직 태어나기 전의 태아다. 그의 어머니 트루디는 남편 존을 죽이기 위해 자신과 불륜 관계에 있는 남편의 동생 클로드와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하지만 태아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트루디는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리를 듣고, 트루디의 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을 느끼고, 그가 섭취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다. 라디오를 즐겨 듣고 음악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방송을 선호하고, 팟캐스트 강의와 자기계발 오디오북도 좋아하는 트루디의 성향은 주인공을 놀랍도록 지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넛셸>이 <햄릿>의 독특한 재해석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율리시스>를 좋아하는 등 어떠한 취향과 해박한 지식을 가진 화자는 자신을 임신한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고민한다. 자신이 끝끝내 태어나서 아버지의 죽음을 저지할 것인지 함께 파멸하는 게 나은 길인지 계속해서 갈등한다.
<속죄> <체실 비치에서> 등을 쓴 이언 매큐언의 14번째 장편소설이다.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 묘사가 돋보였던 최근 작품과 달리 <넛셸>은 오로지 상상에 기대야 하는 설정에 기반을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박학다식함을 묘사하는 글은 막힘이 없고, 그 내용도 사회과학부터 자연과학, 인문학을 모두 아우르며, 젠더 문제를 비롯한 각종 사회 이슈에 나름의 잣대를 갖고 정리한 입장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단지 지식의 현학적인 나열에 그치지 않게끔 주인공이 처한 상황의 딜레마와 실존적 질문을 자연스럽게 연결해낸다. 여기에 트루디와 클로드의 범죄 공모를 지켜보는 대목은 거의 장르 소설 같은 긴장감을 전달한다. 책을 덮고 나면 다양한 층위의 글감을 한 호흡으로 엮어내는 이언 매큐언의 뛰어난 기교에 자연스레 감탄하게 된다.
태아인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초조하게 탯줄을 만지작거린다. 탯줄은 내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염주 역할을 한다. 잠깐, 나도 앞으로 유치함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텐데, 유치한 게 뭐가 문제라는 거지? 나는 그런 강연을 많이 들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만큼 유식하다. 비관주의는 너무 쉽고 달콤하기까지 하며, 어디서나 지식인의 증표요 상징이다. 비관주의는 생각하는 계층에게 해결책 제시의 책임을 면해준다. 우리는 연극과 시, 소설, 영화 속 어두운 생각에 흥분한다. 그리고 이제 논평의 어두운 생각에까지도. 인류가 지금처럼 풍요롭고 건강하고 장수한 적이 없는데 왜 그런 말을 믿어야 하는가?(43쪽)
두 가지 대립되는 관념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켜둔 팟캐스트에서 들은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 서재의 소파에 앉아 있었고, 여느 때처럼 무더운 한낮을 향해 창문들이 활짝 열려 있었다. 므시외 바르트가 말하기를, 권태는 희열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고 인간은 기쁨의 해안에서 권태를 바라본다.(1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