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나를 보았다 말하고, 나는 그가 대학생일 때 처음 만났다고 말한다. 우리의 첫 기억은 엇갈리지만, 뜨겁게 만난 게 2004년 5월 29일이라는 점엔 다툼이 없다. 우리끼리 ‘오이구’라고 부르는 평택생명평화대행진의 핵심 구호는 전쟁 반대였다. 참석자들은 대추리에 드리운 전쟁기지의 그늘을 걷어치우라고 외쳤다. 아울러 삶이 전쟁터가 되어버린 노동자, 빈민, 여성, 장애, 생태의 아우성을 함께 듣자고 호소했다. 구호와 함성,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한국판 우드스톡, 1박2일의 반전축제였다.
어쩌다 우리 가족은 바느질로 면생리대를 만들던 ‘피자매연대’ 천막에 놀멍쉬멍 머물렀는데, 거기서 그를 만났다. 학생활동가였다. 우리집 꼬맹이와 잘 놀아준 언니였다. 그날 밤하늘을 가르던 한편의 감동적인 연설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문정현 신부는 지팡이를 움켜쥔 채 ‘평화가 무엇이냐’고 역설했다. 그 밤을 함께했던 음악가 조약골은 훗날 그 연설에 곡을 붙였다. 문 신부는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을 이끌고 전국을 다니며 대추리의 고통을 알렸다.
시름이 깊어지기만 하던 2005년 가을 우리 가족이 대추리로 이사했을 때, 평화바람은 이미 대추리 주민이었다. 그는 평화바람에 합류해 있었다. ‘딸기.’ 용산참사 현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지금은 제주 강정에 산다. 가끔 눈에 띄는 그의 짧은 글 속에 내가 머문 시간도 있음을 발견하고 생각에 잠기곤 한다. 엊그제 그가 온라인에 올린 한장의 사진은 내가 찍은 그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때 상단을 꾸려 ‘돈’의 연대를 모색하던 얼치기 장사꾼이었다. 해산물 판매 ‘찌라시’에 전복으로 변한 인간의 사진을 넣기로 했는데 그가 모델이었다. 딸기는 강정천에서 머리를 감으며 전복이 되었고, 그녀가 감기몸살을 앓을 때 우리는 돈을 벌었다. 초기 강정싸움의 종잣돈이었다. 어느새 긴 시간이 흐르고 있다. 몇도였을까. 사진을 꺼내 보며 회상에 잠겼을 그 마음의 온도.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라는 괴물기지 건설에 맞서 강정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은 10년을 싸웠다. 한데도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나라가 팔아먹은 엉터리 안보장사를 전복시켜야 했건만 나와 친구들이 한 짓은 딸기를 전복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우스웠나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