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팬이라는 어떤 분이 내 홈페이지에 무지개행동 활동가들을 ‘광견들’이라고 빗댄 글을 남겼다. 하긴 어디 그 사람뿐이었나. 무대에 ‘난입’했다는 이유로, 문재인 지지자들이 쏟아낸 비난의 쓰나미는 무참했다. 연설 끝날 때까지 기다렸던 활동가들의 배려는 안중에도 없었다. 문재인 후보의 멱살이 잡혔다는 ‘가짜 뉴스’를 지적한 나 역시, 된통 당했다. 배후세력이 있다는 온갖 음모론들이 난무했다.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자유게시판은 쑥대밭이 되었고 줄줄이 후원도 끊겨나갔다. 졸지에 성소수자들은 적폐세력으로 매도되었다.
왜 홍준표에게 가지 않고 문재인에게 따지냐고 묻는다. 말귀 없는 혐오 군상 홍준표보다 문재인이 천배는 더 나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동급으로 취급되길 바라는가. 또 문재인이 그리 만만하냐고 묻는다. 미안하지만, 대통령 후보는 원래 만만한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왜 난입하면 안되는가. ‘광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특히나 성소수자들이 아니라 기독교계를 먼저 찾아가 ‘동성애 반대’를 천명했고, 뒤이어 대선 토론에서 또다시 반대를 확언했던 자칭 민주주의를 계승한다는 대선 후보에게 따져묻는 것이 대체 무슨 잘못인가.
지난 총선, 민주당 후보들의 동성애 반대 논란이 일었을 때 뭐라 말했었나. 1당이 되면 사정이 달라질 거니 가만히 있으라 그랬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강력한 혐오의 언어였다. 대선 후보의 ‘동성애 반대’. 가뜩이나 동성애자 군인 체포라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긴박한 시기에 유력 대선 후보의 반대 발언은 그 혐오를 승인한 것과 다르지 않다. ‘혐오해도 된다’는 정치적 시그널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지자들의 다그침과 협박이 쇄도했다. 급기야 홍준표는 그보다 더 세게 나가기 위해 ‘동성애 엄벌’을 공언했다. 그러나 그런 뻔한 혐오보다 ‘가만히 있으라’는 자칭 민주 시민들이 발산하는 혐오가 더 공포스러웠다. 이 상황에, 무대 ‘난입’의 직접행동을 통해 상처를 토로하지 않았다면, 동성애 반대가 선언되었던 그 밤 성소수자들이 흘린 눈물과 울분의 바리케이드가 심상정 후보의 통장과 지지율을 진동시키지 않았다면 문재인의 ‘사과’는 당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동성애 문제는 한국 정치의 화약고가 되고 말았다. 빈사 상태의 기독교가 생존을 위해 성소수자들을 제물 삼은 것처럼 극우들 역시 생존을 위해 반동성애 프레임을 짰다. “당신은 동성애를 반대하는가?” 또 다른 색깔론이 등장한 것이다. 문재인의 삼고초려에도 불구하고, 범기독교계는 보란 듯이 홍준표를 지지하고 나섰다. 바로 이런 퇴행적인 프레임에 순응하는 것이 적폐다. 소수자들의 눈물을 ‘나중에’로 외면한 채 선거 승리에만 골몰하는 정치공학은 단 한번도 ‘나중에’를 ‘지금 당장’으로 현실화한 역사가 없다. 이미 소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몫 없는 자들도 무대 위에 맘껏 난입해 춤을 추는 어떤 순간이다. 유예라는 말로 살해되지 않는 삶의 노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