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박쥐성의 무도회>. 이탈리아의 알프스 지역인 돌로미티가 배경이다.
이탈리아의 지도를 펴보면, 북쪽 국경은 전부 산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여기가 알프스다. 알프스는 유럽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대륙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스위스가 알프스를 잘 이용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알프스를 주로 스위스와 연결하여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알프스는 여러 나라에 걸쳐 있다. 왼쪽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알프스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슬로베니아까지 연결돼 있다. 그러니까 이탈리아의 북쪽 국경 전부가 알프스인 셈이다. 알프스의 유명 산들, 이를테면 몽블랑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걸쳐서, 마테호른은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걸쳐서 있는데, 사람들은 이런 산들도 대체로 프랑스, 스위스와 연결하여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탈리아는 지중해의 바다와 연상되는 경우가 더 많아서일 것이다. 이탈리아와 설산은 선뜻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선 이미 동계올림픽이 두번 열렸다. 미국(4번), 프랑스(3번)에 이어,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과 더불어 2회 개최한 여섯 국가 중 하나다. 이것은 알프스가 있어서 가능했다. 이탈리아의 알프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지역이 돌로미티(Dolomiti)이다. 이탈리아 북쪽 국경의 동쪽 알프스 지역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의 돌로미티 사랑
개인적으로 돌로미티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산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 때문이다. 그는 등산에 관한 온갖 기록은 다 갖고 있다. 에베레스트 최초의 무산소 등반(1978), 셰르파 없는 최초의 단독등반(1978), 히말라야의 8000m 이상 14개 봉 전부를 등반한 최초의 산악인(1986)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메스너는 자신의 낭가파르바트 무산소 단독등정의 과정을 기록한 <검은 고독 흰 고독> 같은 산악에세이를 다수 남긴 작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산악문학 장르의 대가로도 평가된다. 절대고독의 고립감, 죽음의 공포 앞의 겸손함을 그처럼 진정성 있게 묘사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글을 쓰는 산악인’ 메스너는 그래서인지 철학자 같은 풍모마저 풍긴다. 산을 오르는 데만 머물지 않고, 늘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새로운 등산법을 만들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메스너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그 자체로 감동의 대상이다.
등산에 관해 그가 늘 강조하던 곳이 바로 돌로미티이다. 어릴 때부터 돌로미티를 부친과 함께 오르며 산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는 것이다. 메스너라는 독일식 이름에서 이탈리아 국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데, 돌로미티 지역이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 과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래서 지금도 독일과 오스트리아계 주민들이 많이 산다. 이곳에선 이탈리아어와 함께 독일어가 광범위하게 쓰인다. 메스너도 어릴 때부터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함께 쓰며 성장했다. 이 지역에서 비교적 큰 도시인 인구 10만명의 볼차노(Bolzano)는 이탈리아 내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메스너도 볼차노 인근 출신이다. 다시 이탈리아 지도를 펼쳐놓고, 북쪽의 돌로미티 지역과 남쪽의 시칠리아 섬을 동시에 바라보면,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지역적 다양성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한눈에 보일 것이다. 아프리카 아랍문화와 친화적인 시칠리아, 그리고 사람들 이름마저 독일식이 많은 돌로미티 지역까지, 모두 이탈리아의 한 문화 속에 녹아 있는 셈이다.
돌로미티 지역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제7회 코르티나동계올림픽’(1956) 덕분이다. TV 시대를 맞아 동계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TV로 중계되며, 돌로미티 지역의 아름다움은 전세계로 알려졌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트레킹의 천국 같은 끝없는 구릉, 곳곳에 펼쳐진 호수, 그리고 여기에 이탈리아 특유의 활기가 보태져서 이웃 국가의 알프스 지역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동계올림픽 개최지의 정식 이름은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인데, 보통 코르티나라고만 불린다. 코르티나는 돌로미티 지역에 있는 조그만 마을일 뿐인데, 올림픽 덕분에 최고의 겨울 휴양지로 거듭났다. 코르티나는 베네치아 북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곧 코르티나는 ‘최고의 산과 최고의 바다’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는 셈이다.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핑크 팬더>. 동계올림픽 개최지였던 코르티나가 배경이다. 오른쪽은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핑크 팬더>, 돌로미티를 스크린에 옮기다
코르티나 중심의 돌로미티 지역이 영화적으로 각광을 받은 것은 <핑크 팬더>(1963) 덕분이다. 희극의 장인인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과 ‘괴짜 신동’ 피터 셀러스가 짝을 이뤄 시리즈물로 발전시킨 코미디의 첫 작품이다(시리즈는 모두 9탄까지 이어졌다). 어느 중동 국가의 공주(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다이아몬드의 이름이 ‘핑크 팬더’인데, 이를 훔치기 위한 유명 도둑 ‘팬텀’(데이비드 니븐)과 경찰(피터 셀러스) 사이의 쫓고 쫓기는 코믹 수사물이다. 공주가 겨울 휴가지로 머무는 곳이 코르티나여서, 영화는 주로 설산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당시는 올림픽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을 때여서, 코르티나의 바위산, 스키장, 산장들은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공주의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이야기인지라, 자연스럽게 코르티나의 화려한 면이 강조돼 있다. 은빛 설산의 스키 타기, 다양한 썰매들, 휴양지 관광객의 파티 등이 시각적 화려함을 장식한다.
겨울 스포츠의 제전인 올림픽 개최지로서의 코르티나를 영화 스토리 전개의 바탕으로 이용한 작품이 <007 유어 아이즈 온리>(1981)이다. 신무기의 기술을 훔치려는 러시아에 대항해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가 맞서는 냉전적 스토리다. 제임스 본드가 러시아 일당을 좇아간 곳이 코르티나이다. 여기서 본드와 적들 사이의 추격과 격투가 이어지는데, 그 과정은 전부 올림픽 종목을 이용하여 표현돼 있다. 처음에 스키를 타고 추격전을 벌일 때는 크게 주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곧이어 스키점프, 바이애슬론, 봅슬레이 같은 올림픽 종목이 계속하여 액션에 이용될 때는 탄성이 나오기도 한다. 추격의 배경으로 피겨스케이팅, 아이스하키까지 나오니, 제임스 본드 혼자 동계올림픽 종목을 거의 다 뛰거나, 참가하는 형식이 되는 셈이다. <007 유어 아이즈 온리>를 통해 동계 스포츠의 요람으로서의 돌로미티 지역의 명성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다.
돌로미티를 공포물, 정확히 말한다면 코믹 공포물의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 로만 폴란스키의 <박쥐성의 무도회>(1967)이다. 영국의 ‘해머 공포물’(Hammer Horror)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과장된 핏빛, 드라큘라, 과장된 연기, 저예산의 세트 등이 해머 호러와 궤를 같이하지만, 폴란스키는 여기에 코미디를 섞어놓았다. 괴짜박사(잭 맥고런)와 멍청한 제자(로만 폴란스키)가 드라큘라를 잡겠다며 설쳐대는 곳이 돌로미티이다. 호러영화답게 시간적 배경이 주로 밤이어서, 돌로미티의 설산은 푸른색으로 표현돼 있다. 겨울 휴가지, 또는 스포츠의 요람으로서의 이미지와 다르게 여기서는 돌로미티가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등산을 상상해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클리프행어>(1993)가 있다. 악당들이 잃어버린 돈을 되찾기 위해 로키산맥의 설산을 헤집고 다니는 이야기다. <클리프행어>의 공간적 설정은 로키산맥이지만, 실제 촬영이 이뤄진 곳은 돌로미티이다. 악당들이 인질처럼 끌고 다니는 산악인이 실베스터 스탤론인데, 그럼으로써 등반에 관련된 여러 액션들을 선보인다. 180도로 꺾인 암벽을 거꾸로 매달린 채 오른다거나, 손가락 몇개에 몸 전체를 걸고 암벽에 매달려 있는 장면 등은 산악 액션의 정수로 보인다. 돌로미티 설산의 아름다움은 특히 영화의 전반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스탤론이 혼자서 온갖 곡예를 선보이며 암벽을 오르는 장면에서다. 돌로미티 암벽의 장관이 배경인 것은 물론이다.
황금빛 태양, 지중해의 푸른 바다로 특징지어진 이탈리아의 이미지에 북쪽의 돌로미티는 고요하고 엄숙한 산의 매력을 덧붙여준 공간이다. 남쪽의 뜨거움에 대비되는 북쪽의 차가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