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응 감독의 VR 시네마 어트랙션 <화이트 래빗>(Follow the White Rabbit)의 한 장면.
VR(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업계 화두로 떠오르던 2년 전, 20주년 창간 특집호에서는 VR과 영화의 접목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영화의 스토리와 촬영 기술의 변화에 주목해봤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VR영화의 실현 가능성이 보다 구체화되었고 게임과 영화 분야의 제작 기술의 경계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탄탄한 내실을 다져가던 VFX(CG 기반 시각효과(Visual Effects)) 분야가 주목받고 있다. 과학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박재욱 EVR 스튜디오 이사와 강윤극 세종대학교 소프트웨어융합대학 교수 등은 이른바 할리우드 VFX 진출 1세대다. 이들이 지금 VR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발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 VFX 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덱스터, 디지털 아이디어 등의 기업에서 출발해 여러 분야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는 전문가들 역시 마침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었다. 이들이 바라보는 국내 VFX 산업 현황, 그리고 새롭게 도전하는 영역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유태경 덱스터 디지털 휴먼 & VR 연구소 소장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예술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덱스터에 들어와 크리처 슈퍼바이저를 거쳤고, 지금은 디지털 휴먼 & VR 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미스터 고> 고릴라 탄생의 일등공신 중 한명.
-<씨네21> 현재 맡고 있는 분야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강윤극_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텍에서 영화 특수효과와 가상현실, 3D애니메이션 전공을 가르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가상현실 플래그십 위원장을 역임했고, <미스터 고>(2013)를 만든 덱스터 초기 설립에서부터 상장 전까지 전체 생산 공정 슈퍼바이저를 맡기도 했었다.
=박재욱_ VR 게임 콘텐츠를 만드는 EVR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다. 시나리오작가를 고용해 AI 기반의 1인칭 체험형 콘텐츠 등을 만들고 있다. 게임 업계에서 쓰이던 기술을 VR 콘텐츠 속에 구현하는, 즉 더욱 사실적인 캐릭터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중이다.
=채수응_ 미국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며 다양한 미디어 진출 활로를 경험한 뒤 귀국했다. 이후 <미스터 고>에 참여하면서 VFX가 영화 현장의 전반적인 파이프라인을 바꾸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초능소년사건>이란 영화를 연출했고 덱스터와 함께 홍콩 진출 사업을 논의하는 중이다.
=유태경_ 덱스터 스튜디오의 디지털 휴먼 & VR 연구소 소장이다. 주 업무는 VFX를 통해 영화에 디지털 휴먼을 등장시키는 분야의 기획 개발, 그리고 덱스터가 진출하고자 하는 VR 콘텐츠 제작 및 기획 개발을 함께 책임지고 있다. 소장이라는 직함보다는 테크니컬 디렉터라 불리는 경우가 더 많은데 주로 파이프라인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업무를 맡기 때문이다. <미스터 고> VFX 작업에 참여했다기보다는 3년간 문제 해결만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웃음) 또 재미있는 점은 아티스트에게는 내가 테크니션이지만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내가 아티스트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도 아닌, 창조적인 일만 하는 것도 아닌, 일종의 첨단 기술을 융합해서 가장 빨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역할이라고 보면 되겠다.
=지명구_ IOFX의 공동 대표다. 공식 직함은 S3D(3차원 입체시(Stereoscopic 3D)), VR, VFX 기술감독이다. 정부 산하 진흥원들과 관련한 사업, UHD, VR과 관련한 아카데미 강의 및 선임연구를 하고 있다.
-<씨네21> 3D의 하향세, 게임 엔진을 이용한 VR 시네마라는 새로운 화두의 등장부터 영화 전편을 CG로 이용해 만들어낸 <정글북>(2016)의 오스카 수상 소식 등 VFX 업계가 다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 같다.
강윤극_ 오늘날 세계적으로 위상이 달라진 마블의 성장 동력은 VFX였다. 실사로 구현할 수 있는 CG 기술이 없었다면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테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VFX 스탭은 영화 크레딧 맨 뒤에 등장한다. 심지어 이름이 많다며 잘리기도 한다. 크레딧 순서가 업계 전반에 걸친 그 분야의 위치에도 영향을 끼치는 듯하다.
지명구_ 앞서 유 소장의 소개에 덧붙여서 이야기하자면, 현재 VFX는 융·복합 기술에 관한 최근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는 분야다. 테크니컬 디렉터의 포지션이 디벨로퍼와 아티스트의 중간이라고 얘기하셨는데 이를 산업적으로 해석하면 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트렌드가 만나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아바타>(2009)가 느닷없이 등장한 게 아니다. 영화 역사에서 30년 주기로 인기몰이를 해왔던 것이 최근에 와서야 <아바타>라는 콘텐츠와 제작 기술, VFX 분야 등과 융합되며 대중적인 반응을 얻은 것이다. 지금의 VR도 마찬가지다. 특히 VFX 기반 분야가 다른 포지션보다 쉽게 융합을 선도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전부터 늘 해오던 작업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강윤극 세종대학교 소프트웨어융합대학 교수. VFX 할리우드 진출 1세대로 소니픽처스와 월트디즈니, 드림웍스 등을 거치며 <슈렉> <라푼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베오울프> 등을 작업했다.
할리우드에서 일하기
-<씨네21> 박재욱 이사와 강윤극 교수는 VFX 분야의 할리우드 진출 1세대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진출하게 됐는지, 그 당시 업계의 분위기는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강윤극_ 국내에서 컴퓨터그래픽을 처음 자동차 디자인에 도입해 만들던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자동차 디자인에 비전을 못 느껴 영화로 우회했다. 월트디즈니, 소니픽처스, 드림웍스 등의 회사를 거쳤는데 처음 드림웍스의 전신 격인 회사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동양인이 전체 인원 800여명 중에 회사 대표 포함해 3명밖에 없었다. 그때만 해도 수요는 많은데 VFX 업계에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여러 방면에 걸쳐서 일을 배울 수 있었다. 심지어 2000년에는 영화뿐만 아니라 유니버설 스튜디오 테마파크에 들어가는 <슈렉 4D> 어트랙션팀에서 4D 스크린도 구현해봤다.
박재욱_ 나는 VFX 분야에 진출하고 싶어서 관련 회사들이 많이 모여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디자인 대학교 AAU(Academy of Art University)에 들어갔다. 졸업하고 취업을 하려는데 한국인 선배들이 한명도 없었다. 마침 IMF가 터지는 바람에 집 밖을 나갈 수도 없었고 방에 틀어박혀 친구들과 포트폴리오만 만들었다. 그것을 계기로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3~4년차가 됐을 무렵에 드디어 내가 인사권을 가지고 후임을 채용할 수 있었다. <스파이 키드 3D: 게임 오버>(2003) 찍을 당시였는데 한국인만 15명을 뽑았더니 ‘코리안 마피아’라는 놀림도 받았다. (웃음)
강윤극_ 미국 영화산업에 진출했던 당시 10명도 안 되는 한국인들끼리 서로 회사는 다르지만 마음으로 의지하며 버텼다. 열심히 해서 뭔가 이뤄야겠다는 다짐뿐이었으니까.
박재욱_ 오퍼나지에 근무할 때 있었던 일이다. 2000년대 초반에 <괴물>의 봉준호 감독이 시나리오 초안도 나오기 전부터 웨타와 작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성공으로 단가가 천정부지로 솟은 거다. 그래서 과감하게 포기하고 감독님께 다른 크리처 전문 회사로 갈 것을 제안했지만 진행이 안 됐다. 그래서 “지금 작업 컷 수가 130컷 정도 되는데 여기서 110컷 정도만 줄이면 오퍼나지에서 단가를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줄이시겠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시나리오를 수정하시더라. VFX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고 거의 종사자만큼의 디테일을 알고 계시기에 비결을 물었더니 몰래 학원을 다니셨다고 하더라. 결국 숏 수를 맞추고 계약이 성사되는 걸 보고 나는 웨타로 옮겼다.
-<씨네21>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으로 근무해야 하는 등 해외 진출 자체의 어려움도 있었다고 들었다.
강윤극_ 정규직은 전체 고용 인원의 15% 정도다. 특정 공정에 한해 전체 인력의 50%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정직원을 쓸 수 없는 구조다.
박재욱_ 웬만한 회사들이 월급여를 100억원 이상씩 지출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언제 해고할지 말지는 돈의 문제다. 외국인 신분으로는 해직 후 3개월 안에 다음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그 기간은 정말 피가 마른다. 내가 언제 그만두는지 알면 구직 활동이라도 할 텐데 일주일 전에 통보하거나 일주일 단위로 연장하는 식이다. 비인간적인 처사도 있는데 추수감사절 전날에 해고했다가 다음날 재고용한다. 추수감사절 당일의 일당을 지급하기 싫어서다. 불법이 아니라 계약서상의 갑을관계 조항이 그렇게 되어 있다. 2000년대 초반의 ILM에서는 근무하다가 방송 스피커에서 이름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짐을 싸야 했다. 보스와 대면도 없이 그냥 나갔다.
강윤극_ 산업의 생존을 위해 노동력의 유연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월급이 아니라 주급이기 때문에 우리보다는 유연성이 4배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부도나서 문 닫는 곳이 많았다.
박재욱_ 좋은 점도 있다. 자리만 잡히면 웬만한 회사는 야근수당이 보장되어 있다. 3~6개월 동안의 야근수당만 1억원 넘게 받은 적도 있었다.
강윤극_ 나는 뚜껑 열리는 차를 샀었지. (웃음)
채수응_ 내가 왜 영화 연출 전공으로 유학을 갔는지 모르겠다. 의미가 없었네. (웃음) VFX는 연출이나 편집 분야에 비해 회사 차원에서 비자 스폰서를 해줄 수 있는 고용주가 많기 때문에 진출이 수월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지난 10여년 동안 “후반에서 고치자”는 말을 종종 들었다. 정말 굴욕적인 말이다. 현장 진행이 엉망이니까 대충 찍고 후반에서 고치자는 의도인데 그것 자체가 후반 공정을 멸시하는 태도다. 할리우드에서도 그랬다. 물론 후반 공정의 중요성보다 현장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현장에서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고 또 현장이 너무 뛰고 싶어서 미국 드라마 <CSI 마이애미> 시즌3에 조명팀 보조로 일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인종차별 등의 부당 대우가 많더라. 일단 덩치 큰 백인들이 힘도 더 잘 쓰니까 우위를 점하게 되고 자연스레 아시아인들은 후반 공정으로 빠지는 경우도 봤다. 그러다가 국내에 들어와서 덱스터에 참여하게 됐다.
채수응 감독 최근에는 추상미 감독의 장편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제작했고, VR 시네마 어트랙션 <화이트 래빗>(2016) 연출, 한·중 합작영화 <초능소년사건>(2016)의 연출 및 공동제작을 맡았다. 전 덱스터 스튜디오 소속 VFX 프로듀서였다.
도제 시스템을 벗어나 인력 전문화로
-<씨네21> 그러면서 자연스레 할리우드와 국내 현장의 차이, VFX 종사자 내의 업계 분위기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것 같다.
채수응_ 다행히 군대를 다녀와서 그런지 조금은 덜 혼났다. (웃음) 그때만 해도 다들 영어가 부족하니까 첨단 기술을 들여오는 부분에서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김용화 감독이 어느 날 나를 불러 ‘카메론 페이스 그룹의 한국판을 만들어야겠으니 촬영팀도 훈련시켜서 입체 촬영을 준비해보자’고 얘기하더라. 그때부터 촬영팀과 몇 개월씩 뭉쳐서 거의 장비 집행을 22억원 넘게 했던 것 같다. 엄청 비싼 리그를 써가며 고생하다가 후반 솔루션을 찾는 과정에서 오큘라라는 소프트웨어를 발견하기도 했고. 당시 VFX에 대한 절실함과 현장의 변화를 느꼈다. 그것이 고스란히 <미스터 고>의 VFX 퀄리티에 영향을 끼쳤다. VFX가 영화의 전반적인 파이프라인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 VR 프로젝트를 연출하다 보니 아까 이야기했던 파트별 융합의 중요성을 또 한번 깨달았다. 이제는 게임 엔진을 들여와 영화와 접목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슈들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강윤극_ 기술력으로만 단순 비교하자면 국내 인력으로도 충분히 할리우드에 뒤지지 않는 퀄리티의 VFX 작업이 가능하다. 다만 전체 예산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점, 분야별로 고루 발전을 이뤄야 하는데 중국 시장 덕분에 VFX만 유독 빠른 성장세를 보인 점들은 아쉽다. 그래서 덱스터의 경우, 중국 시장에서 다양하게 경험했고 그 노하우를 오히려 중소 제작사에 제안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채수응_ 미국, 중국 현장을 경험해보니 그들은 인력 전문화가 비교적 잘 이뤄져 있었다. 우리는 도제 시스템을 탈피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방송국 시스템이 필요하다. 일종의 연출 제작의 통합이다. 연출 제작부의 개념을 나눠서 진행해야 현장이 프로듀서 중심으로 갈 수 있다. <신과 함께>에서도 좋은 예제를 봤다. 감독님도 연출부 없이 제작부가 일을 도맡아서 하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기존 인력의 인식이 조금만 바뀐다면 스케줄 전문 조감독 같은 인력 전문화가 가능할 것 같다.
유태경_ 고용이 안정화된 것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고용 불안 때문에 필드를 떠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 것도 있다. 예전에는 현장에 가서 마크원 좀 붙이자면 비협조적인 경우가 많았다. 어디 VFX 따위가, 이러면서 기싸움하고. CG 예산이 큰 영화를 하면서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편으로는 스페셜리스트가 좋기는 하지만 전체 파이프라인 오버헤드를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독이 되기도 한다. 덱스터의 경우 최대한 파트별로 전문화해서 작업하려 하는데 제너럴리스트를 양산하는 움직임도 같이 가고 있다. 너무 분업화되어 있으면 일이 몰려서 다른 사람들은 놀아야 하는 경우도 생기니까. 효과적인 관리를 위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현재는 파이프라인이 안정화되어 있다.
채수응_ 제너럴리스트는 역시 어렵다. 툴이나 공정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요새 달라진 점은 슈퍼바이저가 현장에서 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소스 촬영이나 숏을 진행할 때는 VFX 설계가 끝난 경우에 슈퍼바이저가 현장 진행을 리드한다. 스탭들의 시너지도 워낙 좋다. 미술, 분장 파트가 우리를 항상 체크한다. 예전에는 자기들끼리 하다가 요즘에는 VFX는 무조건 컨설팅을 한번 하고 간다.
-<씨네21> VFX 분야가 VR이라는 새로운 기술과 만났을 때 과연 어떤 도전을 할 수 있을까, 궁금증이 컸다. 영화와 게임의 제작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지명구_ 단적으로 CG 작업의 여러 기존 사례를 확장할 수 있는 분야가 VR이다.
강윤극_ 아무래도 CG 영역이 VR로 진출하기 제일 쉬운 것 같다. 평소 하던 작업에 튜닝만 하면 되는 개념이니까. 그저 새로운 디바이스가 개발됐을 뿐, 인터랙티브 개념은 게임에서 하던 거니까. 업종을 전환하지 않고도 자체적으로 캐시카우를 가질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박재욱_ 같은 결론이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고 싶다. 콘텐츠로만 한정짓는다면 휴먼 팩터(3차원 디스플레이, 콘텐츠 등이 유발하는 자극과 인간의 공간지각 사이의 함수 관계를 연구하는 분야.-편집자)라는, 일종의 어지러움증이 VR의 가장 큰 화두다. 이로 인해 기존 영상과는 연출 방법이 완전히 달라져야 했다. 입체영화나 후반작업을 해봤던 사람들이 진입장벽이 낮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VR 영상 작업 시에는 카메라가 옆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등의 제약이 많다. 그런데 제약을 다 지키고 보니 결국 재미없는 영상이 만들어지더라는 거다. 일례로 컷 편집이 들어간 VR 영상은 당연히 어지러움증을 유발한다 생각하는데 기존 영화문법에서 하면 안 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봤더니 오히려 VR 영상이 재미있어지는 경우를 고민해야 했다. EVR 스튜디오에서 개발하는 자체 영상 콘텐츠 중에는 ‘점프컷’을 자주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 영상에서는 점프컷이 불쾌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VR 영상에서는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더라는 사례가 흥미로웠다. 그래서 단순하게 위치 이동뿐만 아니라 배경 구조도 바꾸는 등 리얼타임 기반이 아니라 촬영 기반의 편집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VR 문법을 만들어나갈 필요도 있다.
유태경_ 기술적으로는 실시간 렌더링 이슈가 있다. 이미 기존 VFX에서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실시간 렌더링을 차용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는 (두 분야가) 꽤 근접해 있다. 이전에는 못했던 B2C(기업과 소비자간 거래)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VFX 인력들이 게임쪽보다 실험적이라는 점이다. 게임 콘텐츠 제작은 어느 정도 틀에 짜여 움직인다면 VFX는 워낙 변수가 많아서 문제 대응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해외에서도 VFX 기반 인력들이 VR로 많이 진출하고 있다.
강윤극_ VR 영상의 핵심은 몰입도인데 이런 실감을 추구했던 게 VFX다. 게임은 판타지 영역이기 때문에 관용도가 높은 작업이다. 그래서 오히려 VFX가 몰입도를 구현하기 좋은 측면도 있다.
지명구_ 우리가 만드는 것은 게임 엔진을 이용하는 것이지 게임을 구현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박재욱 EVR 스튜디오 이사 VFX 할리우드 진출 1세대다. ILM, 웨타, 오퍼나지 등의 회사를 거치면서 <헬보이> <투모로우> <킹콩> <캐리비안이 해적> 등을 작업했다. 게임회사 블리자드로 옮겨 시니어 테크니컬 디렉터를, EA에서는 아트 디렉터를 역임했다.
더 ‘자연스럽게’
-<씨네21> 게임 엔진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다.
채수응_ <화이트 래빗>이라는 VR 시네마를 시도한 적 있다. 배급 이슈가 있어서 공간 어트랙션과 맞물린 라이드화로 개발해 관객 유치를 해보려고 했다. 이 프로젝트에서도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접목해보고 싶었는데 체감 시간이 너무 짧다는 문제가 있었다. 영화 스토리텔링과 VR에 있어서 영화와 게임 체험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건 결국 시간 점유 싸움이라는 것, 거기에 유저가 얼마나 몰입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2시간짜리 영화 포맷에서 탈피해도 된다고 본다. 디바이스 자체가 원시적인데 시장의 니즈가 있었다. 또한 개인 포맷의 미디어이기에 한 사람이 혼자 볼 수밖에 없는 콘텐츠가 중심이 된다. 결국, 콘텐츠가 제일 우선이다.
유태경_ 위의 질문을 두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다. 첫째, 게임 엔진으로 전통적인 영화의 VFX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할리우드영화의 경우 게임 엔진 기반으로 만든 VFX 숏이 일부 쓰이기도 한다. 덱스터 역시 시도하고 있다. 렌더링 시간을 줄이면 생산성을 높이고 확장성도 좋아지고 재사용률 역시 좋아진다. 둘째로는 게임 엔진으로 만든 VR 시네마가 영화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는 스토리텔링이 탄탄하면 상호작용 없이도 제작이 가능할 거라고 본다.
지명구_ 상호작용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어 보인다.
유태경_ VR 콘텐츠를 개발하다 보니 관객을 너무 성가시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상호작용이나 고품질의 그래픽보다는 역시 스토리가 전달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크리스 밀크 감독의 15분짜리 단편 <라이프 오브 어스>를 본 적 있는데 상호작용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가 고급스럽게 설계되어 있었다. 빅뱅부터 현재까지 사용자가 진화 과정을 보게 되는 이야기인데, 내가 말하는 음성이 변조가 되어 상대방과 대화도 할 수 있는 등의 기술이 등장한다. 스토리텔링만 탄탄하다면 VR 장편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씨네21> <정글북> 사례처럼 영화 전체가 CG로 이뤄진 영화도 등장하는데 앞으로 무엇이 더 가능할까.
박재욱_ 사람의 자연스러움은 아직 진행형이다. 물론 5년 전보다는 발전했다. 언캐니밸리도 어느 정도 넘어섰다. 최근에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2016)의 캐리 피셔를 보며 놀라웠다. 여전히 호불호가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많은 기획 개발이 이뤄진다면 자연스러운 사람을 리얼타임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강윤극_ 디지털 휴먼이 언제 이뤄질 것인가의 문제다. 이미 크리처는 정복된 것 같다.
지명구_ 집중할 수 있는 산업 여건만 된다면 기술이 빠르게 발전할 텐데. 당장 디지털 휴먼을 더 파지 않는 건 VR이 더 빠른 성장세를 보일 것 같아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강윤극_ <정글북>이 중요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디즈니는 이 영화를 일종의 테스트 베드로 사용했다. 이제 <라이온 킹> <뮬란> 등 디즈니 애니메이션 전체가 실사화된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어디까지 만들 것인가, 이제 곧 <정글북>의 꼬마도 필요 없을 것이다.
채수응_ 단편 실험영화 프로젝트에 적용해서 여자 디지털 액터를 만든 적 있다. 이걸 적용해서 유 소장이 이연걸을 젊게 만드는 프로젝트를 했었다. <봉신연의: 영웅의 귀환>(2016)에 썼는데 개인적으로는 언캐니밸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술은 마무리 단계라고 본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할리우드도 예산이나 스케줄상에서 머뭇거리는 중이다. 아무튼 기술적인 한계는 끝났다고 본다. 우리가 열심히 할리우드와 격차를 좁혀왔지만 앞으로는 중국이 해나가는 것과는 다른 우리 체질에 맞는 강점을 키워나갈 때가 된 것 같다. 아직은 그런 부분에는 여유가 없다.
-<씨네21>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유독 VFX가 만족스러웠던 영화의 장면이 있다면.
유태경_ 일로 생각하다 보니 잘 안 보게 된다. (웃음)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2014)에서 나쁜 침팬지가 허점을 노려 공격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만큼은 언캐니밸리를 논할 게 아니라 정말 VFX를 잘 연출한 작업 같다고 생각했다.
강윤극_ 기술적으로는 <정글북>을 이야기해야겠지만 연출이나 연기, CG까지 모두 비교해보면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다. 곰이 습격하는 장면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CG라는 허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CG인 줄 알고 보는데도 찾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허점을 숨기려는 노력과 연출 자체가 좋았다. 왜 제작기를 공개 안 하는가. (웃음) 공개하면 허점이 보일 텐데 아무튼 그 장면만 특이했다.
지명구 IOFX 공동 대표 ‘양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시각효과’를 뜻하는 회사명 ‘IOFX’의 대표답게 스스로를 ‘입체 오타쿠’라고 부른다. 그의 손을 거친 국내외 입체영화는 80여편이며 그중 장편영화는 <미스터 고> <적인걸2: 신도해탕의 비밀> <몽키킹: 손오공의 탄생> 등을 포함해 15편 이상이다.
“이야기꾼들이 몰려왔으면 좋겠다”
-<씨네21> 국내 VFX의 발전을 위해 앞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강윤극_ 학교에 있는 입장에서 VFX 산업이 낙수효과가 크다. 덕분에 3D애니메이션이나 VR 모두 발전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덱스터 같은 상장회사도 생겼고 기술 인력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있으니, 4차산업 혁명 중에서 VFX는 특히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많이 된다. 한국인들이 잘하는 분야 중 하나다. 이렇게 좋은 산업이라는 걸 많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좋은 인력도 유입되고 금융계도 관심을 가지고 발전될 수 있으면 좋겠다.
채수응_ 기술과 예술을 동시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미디어 종사자라면 누구나 융합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스스로를 영화계의 잡상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나 역시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다. 경계를 두지 않고 융합하는 것이 제일 절실한 시기인 것 같다.
유태경_ 항공우주공학이 발전한다고 해서 당장 내가 밥 먹고 사는 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술 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할 수는 있다. VR도 당장의 수익 모델은 없지만 계속 해나가면 좋은 인력들이 사업 다변화의 선봉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선에서 적극적이 되면 좋겠다. 사업 다각화든 수입 다각화든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인터뷰를 읽고 많은 업계의 이야기꾼들이 몰려왔으면 좋겠다. (웃음) 그러면서 새로운 미디어 트렌드가 탄생할 테니까 말이다.